고양 벽제관지(高陽 碧蹄館址)는 사적 제14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이다.
이 자리는 옛 역관(驛館)이 있던 자리이다.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關西路) 또는 의주로(義州路), 연행로(燕行路)에는 이와 같은 역관이 10여처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 휴식하였고, 특히 벽제관은 때로 국왕이 제릉(齊陵)에 제사를 지낼 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한편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역관에 머물러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이라 하겠다. 더욱이 이들 역관은 역을 동반하고 있어서 교통, 통신의 편의를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기도 했다.
더욱이 벽제관은 한양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은 서울로 들어오기 하루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예의를 갖추어 서울로 들어가는 것이 정예로 되어 있었다.
본래 고양군의 옛 읍치(邑治)는 벽제관에서 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는 읍치를 옮긴 1625년(인조 3)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客館)이었다. 그러나 그 후의 중건은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강점기 때 일부가 헐렸고 6․25 전쟁 때 전소되었다. 그러나 1960년경까지도 객관문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하여 무너져버려 현재에는 관사(館舍)의 윤곽과 터전만이 남아있다.
이곳을 기점으로 북방으로 혜음령(惠陰領)과 동북방으로 있는 퇴패치(退敗峙 : 됫박고개), 그리고 서남으로 퍼져가는 도로를 이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장군과 왜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이른바 벽제관 싸움의 전장터 중심지가 되는 자리이기도 하며 이여송군이 혜음령에서 대패한 많은 뒷이야기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벽제관은 관서로 연로에 설치한 첫 역관이었다는 점 외에 국왕이 중국사신을 친히 영송하던 모화관(慕華館)에 버금하는 의미를 지니고, 반드시 1일 전에 이곳에 유숙하고 서울에 들어가도록 한 객사(客舍) 자리라 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사적편(개정판,下)』)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우리고장의)문화재총람-지정문화재편』
『(고양시)문화재대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