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北漢山城)은 사적 제16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서문길 375 외 서울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일원이다.
북한산성이란 이름은 삼국사기에 132년(백제 개로왕 5)에 이미 나타나고 있고, 신라는 이 곳의 비봉에 진흥왕이 순수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603년(신라 진평왕 25)에는 고구려 장군 고승이 북한산성을 포위 공격하자 왕이 10,000명의 군사로 구원한 기록이 있고, 661년에는 고구려의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함께 북한산성을 20여일간 포위 공격하자 성주이던 동타천이 성안의 주민 2,800명으로 필사의 결전을 벌여 물리친 기록이 있다. 특히 이 전투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의 도전을 받고 있던 때이므로 만약 고구려에게 함락되었다면 삼국통일 계획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이 전공으로 성주 동타천은 대사(大舍, 제12관등)에서 대나마(大奈麻, 제10관등)로 승급되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 현종은 고려 태조의 재궁을 옮겨오고 증축하였다. 1232년(고종 19)에는 이곳에서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1387년(우왕 13)에도 개축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의 외곽 산성으로 축성론이 일어나 1659년(효종 10) 송시열에게 명하여 수축하게 하고,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둘레 7,620보의 석성이 완성되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북문, 북문 등 3개의 성문과 10개의 암문, 그리고 시단봉 위의 동장대, 나한봉 동북에 남장대, 중성문 서북에 북장대가 있었다. 성은 다시 중성(中城)을 만들었으며, 처음엔 경리청을 두었다가 1747년(영주 23)에는 총융청에 속하여 관리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상원봉 아래에 130칸의 행궁과 140칸의 군창을 지은 바 있다. 성내에는 승군(僧軍)을 위한 136칸의 중흥사(重興寺)가 승군 총섭(總攝)이 있는 곳이었고, 이 밖에도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 성안에는 8개소의 창고가 있었으며, 99개소의 우물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성곽의 여장은 허물어 졌으나, 현재 대서문이 남아있고 장대지, 우물터, 건물터로 추정되는 방어 시설의 일부가 있다. 성벽은 아직도 잘 남아있는 부분이 많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사적편(개정판,下)』)
『경기도의 성곽』
『성과 왕국 : 북한산성이 전하는 26가지 한국사 이야기』
『북한산 조사연구 자료집』
『문화재안내문안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