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은 사적 제19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양로285번길 33-13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45~1394, 재위 1389~1392)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으로 1394년(태조3) 축조되었으며, 쌍릉 형식을 이루고 있다.
공양왕은 이성계 등에 의해서 즉위한 이름뿐인 왕이었다. 조선 건국 직후 원주로 추방 되었다가 태조 3년(1394)에 삼척부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태종 16년(1416)에 공양왕으로 봉하고 고양현에 무덤을 마련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노신의 딸로 숙녕·정신·경화 세 공주와 창성군을 낳았으나 고려가 멸망한 후 왕과 함께 폐위되었다.
무덤은 쌍릉 형식으로 무덤 앞에는 비석과 상석이 하나씩 놓여 있고, 두 무덤 사이에 석등과 돌로 만든 호랑이 상이 있다. 이 호랑이 상은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태조와 태종 무덤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무덤의 양쪽에는 문신과 무신상을 세웠다. 무덤 앞에 만들어 놓은 석물은 양식과 수법이 대체로 소박하다. 비석은 처음에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있는 무덤을 표시하는 돌은 조선 고종 때에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릉은 이곳과 강원도 삼척시 두 곳에 남아 있는데 이곳의 능은 조선 왕조가 공적으로 인지한 능이고 삼척의 능은 민간에 전승된 능이다. 공양왕과 순비가 삼척이 아닌 고양에서 피란 당시 살해되어 연못에 수장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곳 왕릉에 삽살개 모양 석물이 세워진 것도, 고양 사람들이 연못을 향해 짓는 삽살개를 보고 그들의 사체를 발견했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 중 어느 곳에 진짜 공양왕과 왕비가 묻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고양시청 / 경기관광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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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공양왕릉은 여러 곳에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인가?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
공양왕의 이름은 왕요(王瑤)로 신종(神宗)의 7대손이자 정원부원군 (定原府院君) 왕균(王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國大妃) 왕씨이다. 비는 창성군 진(昌成君 稹)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다.
그는 어질고 자비로웠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유약한 임금일 수밖에 없었다. 즉위 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과 간섭으로 인해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죽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쫓겨났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1394년 다시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예정된 죽음을 당하였다.
재위 3년 동안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친 몇 차례의 제도 개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계 등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이루어진 개혁이었다. 1392년 이성계 일파를 반대한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된 후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은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것이 고려왕조의 마지막이었다.
공양왕과 삽살개 이야기
고양시에는 공양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392년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견달산(현 공양왕릉 인근)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웠다.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 가닥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하였다. 그러나 때가 때이니만큼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다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남몰래 승려들이 밥을 날라 왕에게 드렸는데, 이러한 이유로 식사동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양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승려들과 왕씨 일행이 온 산을 뒤지며 찾았으나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 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을 자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 뒤 양지바른 곳에 장례를 치르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 앞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웠다고 한다.
진짜 공양왕릉은 어디에?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과 강원도 삼척, 고성에 있다. 왜 공양왕릉은 3기가 조성된 것일까? 공양왕은 원주, 간성 등으로 쫓겨 다니다가 1394년(태조 3)에 삼척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삼척에 공양왕의 첫 번째 능이 조성되었다.
이후 어느 정도 정권이 안정된 1416년(태종 16) 군(君)으로 강등되었던 공양왕을 다시 왕으로 추봉하였고, 이즈음에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인접한 고양으로 능을 이전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문화재청에서는 공양왕이 최종적으로 잠들어 있는 곳은 고양시인 것으로 판단하여 고양시의 공양왕릉은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91호로 지정하고, 삼척의 공양왕릉은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하였다.
또 다른 이야기로 홍문관 박사 함부열이 극진히 모시던 공양왕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석관에 모셔 고성에 있는 자신의 선산에 매장하여 보존하였다는 설이 있다. 함부열은 이 사실을 숨기고 후손들에게만 전했다고 한다. 고양시 문화재전문위원 정동일은 “고성 공양왕릉이 건설 공사로 인하여 이장되는 장면을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같이 석관에 모셔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고성 공양왕릉이 진릉일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재미있는 점은 최근까지도 공양왕 후손인 왕씨 종중과 함부열의 후손인 함씨 종중이 이곳에서 공동 고양의 공양왕릉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공양왕의 조성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려 말의 정세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공양왕이 묻혀있는 장소를 알려줄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는 문헌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조 태종조와 세종대의 『실록』을 살펴보면 고양시 원당의 공양왕릉이 진릉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태종조에는 이곳에 있는 능을 보수하고 정비한 뒤 능을 지키는 수호소를 만들게 하였으며, 세종조에는 공양왕의 어진을 안성 청룡사로부터 고양현 능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는 명령을 내린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선조조에 전국에 있는 왕릉을 파악할 때 공양왕릉은 이곳 고양의 능을 진릉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문헌자료만으로 공양왕릉의 위치를 단정짓기엔 무리가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공양왕의 선왕인 우왕과 창왕은 묘조차 조성되지 못했다. 공양왕릉의 진위 여부는 발굴 조사가 없었던 현재로서는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경기도 역사와 문화)백문백답』
『고양시의 역사와 문화재 : 행주얼을 찾아서』
『문화재안내문안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