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묘(崔瑩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23호로 소재지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70-2번지이다.
고려 말기의 명장이며 충신으로 고려를 끝까지 받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처형된 최영(1316~1388) 장군을 모신 유택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3년(1316)에 출생한 최영 장군은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위엄이 있었다.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서 왜구를 여러 차례 토벌하여 공을 세운 때부터였다. 이후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 조일신([趙日新)의 난과 공민왕 3년(1354)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평정한 것을 비롯하여 2차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1차 : 1395, 2차 : 1361)을 격퇴하였다. 공민왕 7년(1358)에는 오예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하는 등 전국 각처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고 수십 차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격퇴시킨 바가 있다. 요동을 정별하려고 우왕([禑王)과 함께 출정하였으나 이성계(李成桂 : 1335~1408, 태조)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 1388)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성계 일파에게 붙잡혔다. 이후 고양에 유배된 뒤 우왕 14년(1388)에 충주에서 처형되어 이 곳에 안장되었다.
봉분은 단분으로 부인 문화유씨와(文化柳氏)와의 합장묘이다. 묘의 형태는 화강암 장대석(長臺石)으로 2단의 호석(護石)을 두른 전형적인 고려 양식의 방형묘(方形墓)이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혼유석(魂遊石),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있으며 그 좌우에는 후대에 세워진 묘비 2기가 있고 봉분의 좌측 후편에 원래의 묘비 1기가 세워져 있다. 묘역의 윗편에는 장군의 부친 최원직(崔元直)의 묘역이 있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고 나서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하였는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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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최영 장군의 묘에는 정말 풀이 나지 않는가?
최영의 생애
우리나라 사람치고 최영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고,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하다 장렬히 전사한 ‘충신’최영을 떠올리는 이도 많을 것이다. 최영은 사람들에게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말했을까? 왜 최영은 고려에 대해 충성을 다했을까? 최영의 묘에는 정말 풀이 나지 않는가?
최영은 고려 말 당대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인물로 집현전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최유청의 5대손이며 사헌부간관(司憲府諫官)을 지냈던 최원직의 아들이다. 최원직은 아들에게 ‘너는 마땅히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유훈을 남겼는데, 이 간결한 유훈은 최영이 청렴결백했다는 주장을 널리 알리는 부수적이며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또한, 최영은 이성계에게 살해된 우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시녀 반야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로서 후에 아들인 창왕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꿈꾸던 이성계 일파에게 살해된다. 창왕이 살해 된 후 이성계에 의하여 추대된 ‘허수아비’왕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결국 최영은 고려왕조와 혈연으로 맺어진 이해관계 속에서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고려 왕조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은 정황상 전혀 이상하지 않다.
최영의 지휘력은 대단하였다. 왜구·원나라·내부세력 등과의 싸움 에서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정세는 그의 뜻과는 달랐다. 성리학으로 무장하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신진사대부 세력이 이성계라는 걸출 한 무장을 받들고 보수세력과 대립구도를 형성해갔던 것이다. 이성계는 비록 가문은 최영에 비해 미천하나 아버지인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회복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진보세력’을 형성하였다. 고려 말의 정국은 우왕의 장인이자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인 ‘보수진영’ 최영과 이성계의 ‘진보진영’이 경쟁구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경쟁구도는 요동정벌론이 논의되면서부터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출병을 명령하였으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를 맞아 싸우다가 붙잡혔다. 이후 현재의 고양시 서부지역인 고봉에 유배되었다가 개경으로 소환된 후 1388년 죽음을 당하였다. 최영은 “나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자라지 않을 것이다.”라고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고 하며, 실제로 최근까지 풀이 자라지 않았다. 이에 그의 무덤을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
최영 장군 묘
최영 장군의 묘는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의 대자산에 위치하며, 부인 문화 유씨와 함께 묻혀있다. 남향하고 있으며 전면은 트여있고 삼면은 산세가 지켜주고 있는 아늑한 명당이다. 풍수지리가 들은 최영의 묘역을 ‘재물보다는 명예를 높여주는 명당’이라고 평가한다. 뒤편에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는데 최영이 아버지를 위해 직접 쓴 신도비가 묘 왼편에 세워져 있다.
최영 장군 묘역 주변으로는 최근까지 큰 소나무가 빽빽하게 식재되어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그늘이 져서 근래까지 사초가 자라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사초가 없었던 까닭에 ‘적분’으로 불리던 최영 장군의 묘는 1976년 사초를 통해서 깨끗하게 잔디가 입혀져 있다. 적분이었을 때 우천 등으로 토사가 흘러내려 묘역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사초를 식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장군의 강직함과 고려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일까. 최영 장군 묘는 무속인들 사이에서 신령이 깃든 곳으로 유명하다. 기가 센 묘역이다 보니 일반인들도 그 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 장군의 묘에 손을 대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 손바닥이 따뜻해진다고 한다. 이처럼 장군의 강렬한 기 때문에 사초가 잘 자라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우리고장의)문화재총람-지정문화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