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청덕리 백제수혈 유적은 동백지구 택지개발사업을 추진하면서 동백~죽전간 도로개설 구간에서 확인되어 구제발굴조사하였다.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백제) 수혈유구 2기, 조선시대~근대의 분묘 7기(토광묘 5기, 개장묘 2기)와 시대 및 성격미상의 수혈유구 1기 등 총 10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백제시기 수혈유구는 서울 몽촌토성, 공주 공산성, 하남 이성산성, 양주 대모산성, 부여 부소산성을 비롯하여 경기지역, 충청지역에서 빈번하게 확인되고 있으나 유구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당한 異見이 존재하고 있다.
1호 수혈유구는 평면형태는 원형이며 단면형태는 원통형에 가깝고 깊이가 180cm 정도이다. 바닥은 별다른 시설없이 생토면을 정지하여 평평하게 하였다. 내부에서 다량의 대옹 4점, 고배 13점, 호 3점, 병 1점, 돌괭이 1점 총 2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그 용도가 제의행위와 관련될 가능성이 제기되어 새로운 고고학적 자료라 할 수 있겠으며 향후 이러한 형태의 유구 성격 파악에 일조할 것으로 판단된다.
유물 기종 구성이 다양성과 병의 存在 및 소호, 광구장경호, 대옹의 특징 등을 통하여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편년하였는데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 수지 백제주거지, 구갈리유적, 대덕골유적, 마북동 백제토광묘유적, 보정리 소실유적, 내대지유적, 삼막곡유적 등 삼국시대 여러 유적과 연계될 수 있다. 이처럼 탄천의 최상류지점이자 삼국시대 지방 거점이었던 용인 구성지역에 백제시기의 유적이 밀집분포하고 이들 유적이 백제의 왕도인 한강남안의 송파구 일대와 수계로 직통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즉 이들 자료는 백제의 중앙과 지방과의 문화관계와 그를 통한 문화권의 설정, 더 나아가서는 백제왕실의 지방세력에 대한 지배관계 등을 규명해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정보가 될 수 있다.
1호 수혈유구에서 출토된 돌괭이(石悸)가 출토예가 희소한 것으로 철제농공구가 보편화된 시기에 석재로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훼기 풍습과 관련된 토기파쇄용일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한편으로는 자루결합부가 마찰로 인해 매끄럽게 마모된 사실로 미루어 굴착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향후 자료축척을 통하여 그 정확한 성격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분묘는 토광묘와 개장묘가 확인되었다. 분묘는 日常生活에서 사용되던 生活器皿이 매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유물을 통해 15세기 후반~16세기에 조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조사완료후 1호 수혈유구는 용인 유적전시관에 이전 복원하여 전시 및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기전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공사, 2006, 『용인 청덕리 백제 수혈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