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기안리유적은 풍성주택에서 아파트와 학교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어 구제발굴조사하였다. 현재는 기안풍성 신미주아파트와 배양초등학교가 건립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구(도랑) 103기, 환구(원형 도랑) 12기, 수혈 222기, 숯가마, 노적 10기, 소토부 14기, 고상가옥, 22기, 조선시대 주거지 9기, 공방지 5기, 찬방지 3기, 묘 4기 등 405기에 달하는 유구가 확인되었다.
기안리 유적은 황구지천黃口池川 주변의 완만하게 형성된 구릉 사면에 입지하며, 유적과 가까운 거리에는 고금산 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철기 생산 공정 가운데 단야공정의 노(爐) 확인되었으나, 유출재와 철재, 유리화된 송풍관련이 출토되었고, 서쪽 구릉에서 다량의 토기편과 유출재 등이 주변지역에서 채집되는 것으로 보아 제철관련 유적의 규모는 약 20여 만 평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기안리 유적의 능선 정상부에는 숯가마(측구부탄요) 분포하고, 그 아래쪽으로는 약 2.5~3.5m 간격을 두고 환호가 3중으로 돌려져 있다. 또 내부에 고상 건물과 목책을 시설한 말각방형 혹은 원형의 도랑을 돌린 공방이 여러 차례 반복 축조되어 있다.
유물은 유구 내부에서 제철과 관련한 각종 슬래그, 철괴, 철광석, 대·소구경 송풍관, 송풍구와 각종 철기류, 다양한 기종의 토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철기류는 철부, 도자, 찰갑, 용기, 낚시바늘, 철추 등으로 고온의 단조작업을 통해 다양한 철기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목탄을 현지에서 생산하여 직접 제철과 철기 생산에 활용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평가된다.
토기류는 색상과 태토에서 차이가 있지만 평저 또는 원저의 단경호, 동이盆, 통배筒杯, 완, 시루, 소형옹 등 낙랑토기 기종이 전체 출토토기의 60%를 넘는 것으로 보아 제철 및 철기 제작 기술을 가진 낙랑 공인 집단이 이주하여 조영한 유적으로 판단된다. 제철 유적 특성상 다량의 연료와 원료의 수급을 위해서는 대규모 노동력에 대한 통제가 필요한 점에서 강력한 집단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경기도박물관, 2009, 『경기발굴 1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