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남양동 유적은 화성 남양지구 도시개발 사업과정에서 확인되어 구제발굴조사되었다. 현재는 공동주택과 기반서설이 조성되어 있다. 유적은 무봉산의 서쪽으로 뻗은 구릉 정상부(해발 90m 내) 및 사면부와 저지대에 위치하며 6개 지점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확인된 유구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12기·수혈 4기, 삼국시대 주거지 1기·주혈군 1기, 통일신라시대 건물지 1기, 조선시대 주거지 110기·건물지 1기·수혈14기·분묘 332기, 숯가마 5기, 소성유구 19기, 야외노지 8개소, 구상유구 2기, 성격미상유구 7기 등 총 517기이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등고선과 평행하게 조성되었으며 평면형태는 세장방형이다. 내부시설은 노지, 저장공, 주혈, 벽구 등이 확인되었으며 바닥과 벽면은 생토면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유물은 발형, 호형 무문토기 외 대부소호, 삼각만입석촉, 일단경식석촉 이단경식석촉이 출토되었으며 무문토기의 문양은 공열문, 구순각목문 또는 구순각목공열문이 주종을 이룬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구조와 출토유물의 조합상 및 방사성탄소연대값을 통해 살펴봤을 때 역삼동유형 세장방형 주거지 성행기인 기원전 10~9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판단된다.
통일신라시대 건물지는 5지점 서사면 하단부에 위치하며, 북서-남동방향으로 길게 자리한다. 건물지는 2기의 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들은 암갈색사질점토층을 기반으로 할석을 세워 축조한 형태이다. 유물은 뚜껑, 대부완, 완, 기와편이 수습되었다. 출토유물 중 연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기형이나 문양 면에서 용인 성복동요지와 비슷한 시기인 9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주거지는 수혈식으로 조사지역 사면부에 고르게 분포한다. 규모는 10㎡ 내외로 소형에 속하며, 평면형태는 방형 또는 말각방형이 약 77%를 차지한다. 난방 ·취사시설의 유형에 따라 크게 방형 또는 원형계열의 부뚜막식 주거지와 장방형의 온돌식 주거지로 구분된다. 출토유물은 분청사기와 백자가 주를 이루는데 발, 종자, 접시 등의 일상생활용기와 小片이긴 하나 시루, 솥 등의 취사용기도 포함되어 있어 내부에서 일련의 취사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자기로 본 중심연대는 15세기 중반에서 16세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숯가마는 풍화암반층을 파고 등고선과 직교하게 조성하였다. 평면형태는 역삼각형, 장방형, 타원형을 띠며, 경사면 위쪽에 배연부를 조성하고 할석을 이용하여 막음처리하였다. 내부에는 목탄과 소토가 가득 차 있었으며 바닥은 수평으로 정지한 후, 편평한 할석을 바닥 전면에 깐 것도 확인된다.
소성유구는 야외노지를 포함하여 총 19기가 조사되었으며, 형식에 따라 단순하게 구덩이를 파고 조성한 형태, 구덩이를 파고 다량의 할석을 이용하여 내부를 채운 형태, 구덩이를 파고 양 측에 부뚜막식의 할석을 세운 형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야외노지와 소성유구는 보조 취사시설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묘는 토광묘 208기, 회곽묘 124기로 총 332기가 조사되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토광묘에서만 관정이 나타나는 점, 토광묘와 회곽묘에서 나타난 명기의 형태, 회곽묘 내 감실과 같은 부장시설이 없는 것, 회곽 내 목관시설은 있으나 명기를 비롯한 아무런 부장품도 없는 경우-명기의 쇠퇴기와 맞물리는 것으로 17세기 중후반으로 추정- 등으로 미루어 토광묘가 회곽묘 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묘는 16~17세기에 전반에 걸쳐 성행하던 형식으로 생각되나 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묘도 많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화성 남양동 유적은 청동기시대(기원전 10~9세기)부터 조선시대(17세기 중후반)에 이르기까지 오랜기간 생활터전으로 점유되어 왔는데, 특히 15~16세기에는 대단위의 마을유적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묘가 조성되기까지 어느 정도 공백기간이 있었고 이후 회곽묘가 성행하는 17세기경에 묘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화성시, 2009, 『화성 남양동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