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제는 현륭원 묘소 물길 입구에 물을 저장하여 현륭원 아래 인민의 전토를 관개함으로써, 위로는 원침을 위하고 아래로는 민생을 위해 건립한 제언이다. 이러한 만년제는 본래 ‘방축수(防築藪)’라 불리었으나 1795년에 ‘만년제(萬年堤)’로 개칭한 이래 1798년(2월 13일~4월 15일, 군정·모군·승군 등 37,920명 동원)에 새로이 축조한 수리시설로, 정조가 현륭원 전배시 거쳐 가는 필로상에 위치해 있다.
만년제의 위치는 신축되기 전인 1797년(정조 21)과 이후 1798년(정조 22) 모두 현륭원 동구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30여 년이 지난 기록인 『화성지』(1831년)에서는 원소 남 3리에 있으면서 유근교에서 수 리 남짓 떨어져 있고, 길 남쪽에는 만년제라 새겨진 표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화성지』의 기록은 『수원부읍지』(1895년), 『수원군읍지』(1899년)에 그대로 전해오고 있다.
만년제는 저습지 위에 조성되었고, 평지형 제언으로 못의 수원이 깊고 마르지 않아 주변 수전에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리시설이다. 괴성과 제방은 황구지천의 곡부 자연습지에 퇴적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조성된 자연퇴적층을 층따기한 후 석축과 성토의 방법을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기초지반의 지내력을 증강시키고 횡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기반토의 가공방법과 성토방법, 이질재료간 일체화 방법, 제내면의 마감방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수집되었다. 곧, 괴성 내 구지표면의 식물유기체층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긴결시킨다든지 제방의 너비를 넓게 하여 안정된 단면적과 지내력을 증강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기초지반을 층따기하거나 일부 구간에 단을 주기도 하고 심(芯)을 축조하기도 하는 등 기초지반과 성토층간에 미끄럼을 방지하여 횡압력에 대응하고 일체화하려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괴성의 석축 최상부에 삼물을 발라주어 방수 처리 및 구조적 보강을 하였고, 문헌상 제방의 상면에는 편결이나 사초를 입혀 토축된 제방면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마감처리해 준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제방 조사는 단면 전체를 절개하여 층위 조사를 하여 전체 규모와 증개축 여부 등을 확인해야 하는데, 조사지역이 한정되어 있어 제내면쪽 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제방의 범위와 규모, 축조방법 등을 추정하는데 그쳤다.
3차에 걸친 시굴 및 발굴조사를 통해 문헌기록의 제원 및 구조와 일치하는 괴성이 발굴되었고, 하수문지의 위치와 규모, 서쪽 제방 내 은구의 규모와 축조방법을 밝혀냈다. 만년제의 축조연대는 출토유물과 괴성 내부(자연 구지표면)에서 수습된 말뚝 및 자연목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를 종합해 볼 때 18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만년제는 조선왕릉 가운데 풍수 및 능행로상에 쉬어가는 공간으로서 역할과 수리시설의 기능을 갖춘 유일한 시설물로서 복합적인 가치를 지니며, 형태나 구조상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므로 향후 추가적인 발굴조사와 장기적인 정비안 수립이 요구된다. 이에 정비·복원계획의 수립시 고고학적 정보의 수집과 유적의 보호를 위하여 제방의 내·외측면을 확인하기 위한 발굴조사, 바닥퇴적층에 남아있을 유물에 대한 수습작업, 하수문지와 관련된 도로개설구간에 대한 추가발굴 등이 본격적인 복원·정비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화성시, 2007, 『만년제 복원·정비 연구』경기문화재연구원·화성시, 2012, 『만년제 2차 시·발굴조사』
경기문화재연구원·화성시, 2013, 『수원시 관내[분천~송산] 국도대체우회도로구간 내 유적 시ㆍ발굴조사 약보고서』
경기문화재연구원·화성시, 2014, 『만년제 3차 시·발굴조사 약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