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석우리 먹실유적은 화성동탄지구 택지개발 사업과정에서 확인되어 구제발굴조사되었다. 현재는 공동주택과 기반 시설이 건립되어 있다.
조사전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었으나 조사결과 유적은 동쪽과, 서쪽, 남쪽의 구릉으로 둘러쌓인 곡간부 지형으로 중앙은 구릉으로부터 흘러내린 토사가 약 4m 가량의 퇴적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유적 조영 당시 지형은 남서쪽, 남동쪽 구릉에서 시작된 물길이 중앙 곡간부를 따라 북쪽으로 흐르고, 다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오산천과 합수한다. 마을은 구릉과 물길 사이의 충적대지상에 위치하고 있다.
층위상 상층과 하층에 각각 성격을 달리하는 유구들이 존재하여 공간 활용의 변화 양상을 알 수 있는 마을유적으로 볼 수 있으나 주거지의 빈도수가 낮고, 수혈과 밭의 비중이 높아 마을의 경관으로 볼 때 소규모 마을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2시기에 걸쳐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하층은 마을의 모습이 갖추어지는 시기로 구릉에는 저장시설로 추정되는 수혈이 밀집되어 있으며, 구릉이 끝나고 충적대지로 연결되는 지점에 등고선을 따라 주거지가 일렬로 형성되었다. 소규모의 주거지는 구릉상에 위치하며 점유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거지의 하단 곡간부에는 등고선과 평행하게 구상유구가 위치하는데 폭이 비교적 일정하고 방향이 정연하여 인위적인 시설계획을 갖고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구상유구의 하단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지상식건물지가 밀집되어 있었다. 복잡한 중복양상을 보이고 있어 단시간내 구조상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층은 주거지가 거의 없고 구릉의 등고선을 따라 좁은 계곡부에 밭이 조성되었으며 아래쪽에 구릉의 등고선을 감싸고 구상유구가 돌려져 있어 경작과 관련된 시설만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합적으로 볼 때 마을의 경관은 하층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 먼저 들어섰고, 단시간내에 상층의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경작유구들로 성격이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조영 시기는 한성백제Ⅰ기에서 Ⅱ기에 해당하며 상층과 하층의 시간 폭은 크지 않다. 자연과학적분석 결과와 유물을 통한 편년으로 볼 때 하층은 대체로 A.D. 4세기 중엽~5세기 초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6호 주거지의 경우에는 중엽에서도 이른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7호 주거지는 중엽에서 후엽으로 이행하는 시기로 추정된다. 상층은 하층과 유물의 조합상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으나 대형 호류가 많고, 기대 등 특수기종이 증가하는 점에서 4세기 후반~5세기 전반으로 판단된다.
출토유물은 대부분 백제화한 시기의 유적으로 판단되나 주거지의 형태는 백제의 중심적 주거지인 육각형 주거지 구조가 보이지 않고 기둥이 4개인 주거지는 호서, 호남 지방에 가까운 구조를 보이고 있다. 주거지의 규모가 대형인 점, 흑색마연토기가 다양하게 출토된 점에서 지역색으로 보기도 어렵다. 4세기 후반 이후 용인 및 발안 지역까지 육각형 주거지 구조를 띠고 있는 여자형 주거지가 확인되는 점에서 완전히 백제화되기 전단계 지방 마을의 하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기전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공사, 2007, 『화성 석우리 먹실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