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화산동 유적은 화성 태안(3) 택지개발사업지구 조성에 따른 구제발굴조사로 확인된 유적이다. 태안(3) 택지개발사업지구는 대부분이 문화재보호구역내에 포함되어 있고, 화산과 성황산에서 남쪽과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저평한 가지능선이 발달한 지형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격과 규모를 갖는 270여기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1지점에서는 수원부읍치 및 건릉 조성과 관련된 건물지와 수혈이, 3지점에서는 구 건릉 재실지와 조선시대 주거지·탄요 등이, 9지점에서는 백제토광묘와 통일신라~고려시대 주거지가, 10지점에서는 고려시대 건물지와 조선시대 주거지가 발굴조사되었다.
1지점에서 확인된 조선 전기의 건물지와 관련 유구들은 수원부읍치의 치소와 관련된 유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1999년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한 화성시 안녕리 188-81번지 일원과 공간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다. 읍치소의 일부분에 대한 발굴조사에 그쳤지만 조선시대 읍치에 관한 역사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가 있다. 원삼국시대 토광묘는 인근의 오산 수청동 토광묘에서처럼 주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유물의 출토양상과 묘광의 구조에서는 동일한 속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토광묘가 확인된 지점은 융건릉이 조성된 화산의 남쪽 산언저리 부분으로, 1999년 한신대학교 박물관이 발굴조사한 화산고분군과 지형적으로 연결된다. 화산고분의 백제묘제가 석곽묘인 사실을 감안할 때 그 이전 단계의 고분들은 산정상부가 아닌 산언저리를 중심으로 분포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3지점 나구역에서 확인된 舊健陵齋室址는 화산동유적의 조사의 최고 성과로 확인된 유구의 평면과 배치가『正宗大王健陵山陵都監儀軌』(1800)에 실린「齋室間架圖」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본 舊健陵齋室址를 통하여 재실의 영역별 건축물의 공간구성과 구조를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새롭게 도입된 立砂줄기초를 확인할 수 있으며, 재실과 안향청에 사용된 영조척이 31.29cm(줄기초로 남아있는 부분을 토대로 산정한 값이어서 보정 여지가 있음)를 대표값으로 하였음도 밝혀졌다. 구 건릉재실터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현장에 원형 보존토록 조치되었다.
출토 유물과 관련해서는 타날문 원저단경호와 금박 유리구슬은 유적의 위계와 편년을 비정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며, 여러 동의 건물지로 구성된 고려시대 건물지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자기류와 도기류는 물론 건릉 조성에 따른 수원부읍치 이전을 전후하여 조성된 유구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향후 여러 분야의 편년자료 및 생활사 복원에 연구자료로 활용될 만하다.
특히 조탁명문백자의 경우 17세기와 18세기의 조탁명문이 주로 ‘天’,‘ 王’,‘ 中’등과 같은 한자 하나이거나 기호 같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19세기 조탁명문은 제작연도와 사용처, 수량 등 구체적인 내용이 중심을 이루는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조탁명문백자는 제기의 관리와 수급방법, 구체적인 사용처에 대한 문제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와 함께 구 건릉 재실지에서 출토된 백자제기류는 상한과 하한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경에 한정되어 청화백자의 제작연대 비정과 관련하여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한국토지주택공사, 2010, 『화성 화산동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