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성 행궁지는 사적 제47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북한행궁은 전란시 왕의 임시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행궁은 북한산성 내 상원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완만한 계곡부에 여러 단을 두어 3개의 영역[내전·외전·외행각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영역간에는 좌우행각과 내·외곽담장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한지(北漢誌)』 宮殿條(聖能, 1745년),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조선후기) 漢城府 宮室條 등에는 행궁의 규모가 대략 130여 칸에 이르는 규모였다고 전하는데, 이번 조사로 문헌기록의 내용을 보완ㆍ검증할 수 있게 되었다.
1차 발굴조사지역인 내전영역은 지형에 순응하며 축대와 배수로를 설치하고 그 위에 전각을 구성하였다. 내전지를 중심으로 전면에 어도와 대문, 외전지로 내려가는 계단이 설치되고 그 좌우로 행각이 둘러싸서 중심영역을 이루었다. 특히 중심영역을 둘러싼 배수 처리와 후면 화계, 내전영역의 경계를 이루는 내·외곽담장지는 궁궐의 내전에 걸맞는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석재의 가공과 축조방법은 조선후기 성숙한 건축기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구들의 구조가 잘 남아있다. 그간 미공개 되었던 내정전의 최근접 사진을 발굴함에 따라 원형복원을 위한 결정적인 고증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2차 발굴조사지역인 외전영역은 내전영역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갖추고 있다. 외전의 중심축에 월대ㆍ계단ㆍ어도ㆍ외대문지가 놓여 있고 그 좌우로 행각이 둘러싼 형태로, 축조당시 총 61칸에서 이후 총 74칸으로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전 영역에서는 특히 1912년에서 1915년까지 영국성공회의 여름피서지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해 주는 서양유물인 램프와 스토브 등이 출토되었고, 1915년 7월 산사태로 훼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물은 조선후기 기와와 자기가 출토되었으며, 분청자와 청자편은 상부 퇴적층에서 소량 수습되었다. 타 건물지 유적과 비교해 볼 때 자기류의 출토비중이 절대적으로 작은 점과 각종 기와 및 철제유물이 다량 출토된 점이 특징적이다.
북한행궁은 18세기 초에 창건된 이래 20세기 초까지 유지되어온 행궁의 공간구성과 축조방법과 중수과정, 건축부재 등에 대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 조선후기 건물지의 난방과 배수시설에 대한 실증자료를 보여준다는 점과 함께 원형 복원을 추정케 해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한울문화재연구원·고양시, 2013, 『고양 북한행궁지 시굴조사보고서』.경기문화재연구원·고양시, 2014, 『고양 북한행궁지 –1차 발굴조사 중간보고서-』.
경기문화재연구원·고양시, 2014, 『고양 북한행궁지 –2ㆍ3차 발굴조사 약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