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도성 및 도성 인근의 수비와 함께 전란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하기 위한 피난처의 목적으로 수축되었다. 인조 2년(1624)부터 시작된 남한산성은 인조 4년(1626)까지 여장(女墻) 1,897개와 옹성(甕城) 3개 등 군사적 목적의 방어시설과 함께 비상시 왕이 거처할 행궁(行宮)인 상·하궐(上·下闕)과 객관(客官)인 인화관(人和館)도 함께 지어졌다. 남한산성의 수축에는 승려 각성을 팔도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 모집을 통해 성을 쌓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였으며, 산성 수어(守禦)를 위하여 성내에 9개의 승영사찰을 두어 팔도에서 올라 온 승군이 숙식하고 훈련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남한산성에는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 2개의 사찰만이 있었는데, 산성의 수축과 함께 개원사(開元寺), 국청사(國淸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天主寺), 한흥사(漢興寺)가 새로이 조성되었다. 한흥사는 갑자년(1624)에 창건된 승영사찰 가운데 국청사와 더불어 맨 먼저 지어진 사찰이다.
이번 한흥사지 발굴조사를 통해서 남한산성에서만 확인되는 특수한 성격의 사찰인 승영사찰의 면모와 전각구성 등에 대한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였는데, 조선시대 건물지 13동, 축대 10기, 담장지 2기, 계단지 2기, 미상유구, 맷돌 등의 유구가 발굴되었다. 한흥사지의 유구를 통해 볼 때 사지는 ‘중심축선상에 불전과 누각을 두고 좌우에 건물이 둘러싸는 산지중정형 불사공간’와 ‘군기고지·창고지·군포지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중심으로 한 군영공간’이 결합된 독특한 배치임이 확인되었다. 즉, 사찰이 갖는 고유 성격인 예불 및 요사공간과 함께 남한산성이 갖는 특수한 성격인 군영공간으로서 무기고·창고 등의 시설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공간은 각기 다른 입지에 놓여 좌향을 달리하고 있지만, 지형을 따라 3~5개의 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각각의 기능과 위계에 맞는 건물군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러 차례의 중창과 부분적인 수리를 통해 크게 3단계에 걸쳐 가람의 변천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불전지와 누각지에서는 청기와가 출토되어 사찰의 위상을 보여주며, 군기고지와 창고지는 그 기능에 걸맞게 매우 긴 장방형 평면에 두꺼운 벽체시설을 갖추고 있고, 승방지는 승려들이 숙식할 수 있도록 구들이 잘 갖추어져 있다. 또한 좁은 대지 안에 여러 동의 전각을 건립하면서 각각의 기능이나 동선 및 배수처리가 원활하도록 축대·담장·배수로·계단 등을 설치하여 공간을 적절히 분할해 주고 있다.
사지 내에서는 다양한 기종의 도기·자기류와 철촉·도자·전촉·철환·연의환 등의 무기류가 출토되어 사료로만 확인할 수 있었던 17~19세기 승영사찰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적으로 중요한 학술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군사도시로서 역할이 세계 속에 널리 부각됨과 동시에 호국불교의 상징인 한흥사지를 비롯한 승영사찰들이 다시금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경기문화재연구원·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2012, 『南漢山城 廢寺址(國淸寺址·漢興寺址) 試掘調査 報告書』.경기문화재연구원·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2014, 『南漢山城 漢興寺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