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회암사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200여 년동안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매우 융성했던 사찰로 경기 북부의 천보산 남쪽 계곡부에 위치해 있다. 문헌에 따르면 늦어도 12세기 후반 이전에는 회암사가 작은 사찰 규모로 존재해 있다가 고려 말에 나옹에 의해서 현재의 규모로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중창 내용은 목은 이색의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조사를 통해 드러난 유구들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이후 회암사는 고려 및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16세기의 폐사 직전까지 지속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크게 융성하였다.
회암사지에 대한 조사는 1997년의 시굴조사와 1998년 이후부터 매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현재 11차 발굴조사가 완료된 상태이다. 건물지를 비롯한 다양한 유구들이 조사되었는데, 대부분은 회암사가 폐사되기 직전의 유구에 해당된다. 회암사 가람은 천보산 남쪽의 경사진 계곡부를 성토하고 석축을 쌓아 8개의 단지로 평지 조성하고 여기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6단지의 보광전지와 7단지의 설법전지, 그리고 8단지의 정청지가 중심 축선을 이루면서 그 좌우에 많은 전각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6단지 아래로도 수많은 건물지들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기와류, 도자기류, 금속류, 소조품류 등 다양하며, 기타 옥제품이 있다.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하면 먼저 자기류, 청기와, 특수기와류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왕실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 유물들의 출토 상태는 회암사 폐사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석제로 제작된 불상의 머리가 고의적으로 잘려져 담장지 밑에 버려진 채로 출토된다든지 6단지 지장료지 서쪽 구지표면과 6단지 동쪽 석축단에서 여러 개체의 도자기들이 한 곳에서 깨어진 채로 출토되었는데, 이는 의도적으로 깨뜨려서 폐기한 것으로 회암사의 폐사 원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보여진다.
[참고문헌]
경기도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양주시, 2001, 『회암사 Ⅰ』경기도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양주시, 2003, 『회암사 Ⅱ』
경기도박물관·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시, 2009, 『회암사 Ⅲ』
경기문화재연구원·양주시, 2013, 『회암사 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