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는 사적 제38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고달사지는 남한강으로 흘러나가는 금당천의 발원지인 고래산 줄기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사원은 통일신라말 개산조인 원감대사 현욱 이래 진경대사 심희, 원종대사 찬유가 주석하여 봉림산문(鳳林山門)의 법맥을 이어오면서 선종사원(禪宗寺院)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으며, 고려 광종대에는 부동사원不動寺院으로 정해지고 법안종계(法眼宗系) 사찰로 유지되어 오다가, 의천이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할 때 회합된 5대 사원 안에 들 정도로 고려시대 대표적인 선종사원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절터에는 고달사지부도, 원종대사혜진탑,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 석조불대좌, 쌍사자석등지, 석조 등 조형미가 뛰어난 석조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1998년 이래로 8차에 걸쳐 이루어진 고달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뒷받침 해주는 고려전기의 유구와 유물은 물론 그 전후의 시간적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유구와 유물들도 노출되었다. 이 유구들은 나말려초 이래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중창과 개수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어왔다. 지형을 따라 크게 3단의 축대 위에 법당지와 불전지, 승방지, 욕실, 요사채 등 28동에 이르는 건물지가 쌍사자석등지와 탑지, 담장지 등과 어우러져 여러 개의 축과 원을 이루면서 영역을 구성하고 전체적인 질서를 갖추어 나갔다. 이는 사료상에 보이는 의천 입적 후 회합된 학승들이 다시 본산사로 돌아간 기록과 17세기초까지 사원이 존재했던 기록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사역의 하단부에는 10세기 후반∼13세기 전반에 조성된 사역의 전면부 전각 구성과 동선 흐름에 관한 정보가 수집되었고, 삼가마와 목탄폐기장, 기와폐기구 등 사역 말단부에서 이루어졌던 여러 행위에 관한 자료를 확보하였다.
나말려초 선종사원에서는 고승 입적시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부도와 탑비가 건립되었다. 고달사지의 경우 두 기의 부도와 두 기의 탑비가 남쪽을 향해 앉혀져 있다. 이 가운데 석조물의 주인공과 제작연대가 분명한 것은 원종대사혜진탑비 뿐으로, 이와 짝을 이루는 부도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들이 제시되어왔다. 이에 발굴조사를 통해 부도의 건립시기와 축조방법을 밝혀 부도간의 선후관계 및 주인공을 추정하는데 기초자료로 활용하려고 하였으나, 조사범위의 한계와 현대에 이루어진 복원정비의 흔적들로 훼손되어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원종대사탑은 조사결과 보호책 하단으로 경사진 전면지형을 보강하기 위한 석축이 일부 남아있고, 기초부 주변으로 후대에 할석과 사질점토로 보축과 보토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고달사지승탑과 후면 축대는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배례석과 용도 미상의 석주, 팔각석물 등은 현대 정화공사과정에서 재배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역 내 출토 유물로는 연화문, 귀목문 수막새와 당초문·인동당초문·초엽문 암막새, 귀면와, 여러 점의 ‘高達寺’명 암키와, 평기와, 전, 도기, 청자음각국화문화형잔탁을 비롯한 자기, 중국자기, 청동향로, 청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되었다.
이처럼 고달사지는 고려시대를 중심으로 하는 사찰의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건축적인 부분은 물론 미술사,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에 중요한 연구 자료를 제공해 준다. 8차에 걸친 연차발굴조사를 통해 고달사의 조영과정과 가람변천, 축조방법, 생활상에 관한 실증적인 고고학 자료를 축척하였다. 이를 토대로 사역 전체에 대한 학술자료를 종합 검토하고, 유적의 연속적인 복원정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참고문헌]
경기도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여주군, 2002, 『高達寺址Ⅰ』.기전문화재연구원·여주군, 2007, 『高達寺址Ⅱ』.
경기문화재연구원·여주시, 2014, 『高達寺址Ⅲ』.
경기문화재연구원·여주시, 2014, 『여주 고달사지 8차 발굴조사 약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