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선생묘(李恒福先生墓) 경기도기념물 제2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산4-2번지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의 명신(名臣) 이항복(1556∼1618)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쌍분이며 부인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합장묘이다. 쌍분 중앙을 중심으로 전면에는 묘비와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있으며, 그 앞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앞쪽의 비탈 아래 약 20m 지점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당(影堂)이 있고 영당 우측 약 30m 지점에는 효종(孝宗) 3년(1652)에 건립된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항복은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우수하였으며 특히, 죽마고우인 이덕형(李德馨 : 1561~1613)과의 기지와 재치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선조 13년(1580)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하고 선조 22년(1589)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정여립(鄭汝立 : 1546~1589)의 모반 사건을 다스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뒤 여러 관직을 거쳐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자 도승지(都承旨)로서 왕비를 개성으로,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였다. 그 동안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오성군(鰲城君)으로 봉해진 후 형조판서(刑曹判書)로 도총관(都摠管)을 겸직하는 등 계속해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선조 33년(1600)에 영의정 겸 영경연(領經莚) · 홍문관(弘文館) · 예문관(藝文館) · 춘추관사(春秋館事) ·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에 인목대비(仁穆大妃) 김씨의 폐모를 극력 반대하다 관직이 삭탈되고, 이듬해 북청에 유배되어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안으로는 당쟁을, 밖으로는 임진왜란의 내우외환을 뒷수습한 명재상이었다. 죽은 해에 관직과 작위가 회복되고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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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오성대감 이항복의 생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고려의 명재상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의 아들이다. 1580년(선조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다. 도승지 재임 중 임진왜란으로 어가를 모시고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이르러 대책을 의논할 때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안으로는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자고 주청하여 왕이 받아들였다. 7년 전쟁 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항복의 경륜이 적중하여 모든 일이 잘 풀렸던 것이다. 1598년 우의정이 되고 오성부원군의 봉호를 제수받고 다시 영의정에 승차하였다. 1604년 호성 일등공신에 서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 살해 사건에 강력 항거하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은거하니 이것이 동강재 은거이다. 은거 중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자 패륜을 깨우치도록 상소를 올리어 반대한 죄로 북청에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1618년 정월에 유배되어 5월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포천의 화산서원, 북청의 노덕서원에 배향되었다.
이항복(오성)과 이덕형(한음)은 죽마고우인가?
이 두 사람은 포천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근거 없이 세상에 퍼진 두 사람에 얽힌 일화·전설의 내용에 기인한 것으로 유추된다. 어린 시절 죽마고우로 이웃에서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풍자, 그리고 재치와 해학이 흘러넘치는 재담과 작희의 주인공이었다는 이야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죽마고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항복은 조상 대대로 포천시 가산면이 고향인데, 그는 부친의 내직 임직으로 1556년(명종 11)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이덕형은 양평이 고향인 사람으로 포천과 연관이 있다면 외가가 포천 자작동이라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겠고, 『한음문고』 서문과 한음 연보에 “공은 한양의 남부 성명방 외제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명방’은 필동에서 남대문까지의 남산골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덕형도 한양에서 출생한 것이다.
두 사람은 1578년(선조 11) 생원시·진사시에 함께 합격하면서 교분을 맺었으니 이항복 23세, 이덕형 18세의 청년 시절이었고 1580년에 이항복은 알성문과 급제, 이덕형은 별시문과 급제로 사가독서를 하면서 더욱 돈독한 동지가 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덕형이 소년시절 자작동 에서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양사언을 따라 시문을 연마하는 등 포천에 왕래는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두 사람은 심오한 경륜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사직을 바로잡아 역사에 그 명성을 남겼다.
오성과 한음 관련 문화재는 이항복선생묘(경기도기념물 제24호), 화산서원(경기도기념물 제46호), 용연서원(경기도유형문화재 제70호)등이 있다.
금불상 도둑을 잡아라
오성(이항복, 李恒福)과 한음(이덕형, 李德馨)이 결혼을 한 뒤 과거준비를 위해 어느 절에 묵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아침, 법당을 관리하는 스님이 오성과 한음이 기거하는 방으로 찾아왔다.
“두 분 도령, 큰일이 생겼는데 나를 좀 도와주시오.”
“큰일이라니 무슨 일입니까?”
“법당에 모셔두었던 작은 금불상이 없어졌습니다. 주지 스님이 아시면 크게 꾸지람을 들을 텐데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스님은 몹시 불안한 듯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 참, 누가 그 귀한 불상을 가져갔을까? 혹시 짐작 가는 건 없나요?”
“어젯밤 잠든 사이에 누가 가져간 것 같습니다. 법당 안이며 절 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거든요?”
“예, 알겠습니다. 한번 연구해 보겠습니다.”
“저도 다시 한 번 찾아볼테니 꼭 좀 부탁합니다.”
스님이 돌아가고 난 뒤 둘은 방에서 나와 절 주변을 거닐었다. 간밤에 눈이 내려 세상은 온통 은빛으로 덮였다.
“절 주변에 발자국이나 사람이 다녀간 흔적이 없는 걸 보면 분명히 절 안의 사람들 중에서 금불상을 가져간 것이 분명해.”
한음이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불상을 훔쳐갔을리는 없고, 불공을 드리러 온 신자들 중에 누군가가 갖고 간 것 같은데.”
오성의 추측이었다.
“맞아, 그런 것 같긴 한데 함부로 남을 의심할 수는 없는 일이잖은가?”
“그렇지, 더구나 부처님을 모신 절 안에서 보따리들을 조사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야,”
둘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는데, 어제 불공을 드리러 왔던 젊은 부부가 ‘기도를 마쳤으니 내려가 겠다’며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을 보자 오성과 한음은 동시에 서로에게 고개를 돌려 눈이 마주쳤다.
“자네 생각도 그런가?”
“그래, 자네도 그렇게 생각했군.”
두 사람 모두 그 젊은 부부가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무엇보다 급한 일도 없으면서 눈이 녹기도 전에 산에서 내려가겠다는 것이 수상했다. 한 서너 시간쯤 뒤면 해가 중천에 떠 어지간히 눈이 녹을 텐데, 굳이 위험한 산길을 서둘러 내려갈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오성과 한음은 방에 들어가 간단히 짐을 꾸려 나와 아까 왔던 스님에게로 갔다.
“스님,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잘하면 금불상을 갖고 오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성의 말에 스님의 얼굴에는 잠시 화색이 돌았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지름길로 산에서 내려와 젊은 부부가 지나갈만한 길목에서 기다렸다. 그러다가 그들의 모습이 보이자 오성과 한음은 각각 헤어 졌다. 기다리던 오성이 그들에게 말을 붙였다.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우리는 경기도 여주 쪽으로 갑니다.”
“아, 그것 잘 됐군요! 나도 그쪽이니 같이 갑시다.”
오성은 그들과 동행이 되어 한참을 걸어갔다. 그러다가 어느 삼거리 에서 한음이 나타나 일행은 넷이 되었다. 물론 오성과 한음은 서로 모르는 척했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점심때가 되었다. 네 사람은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하고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같은 방에서 식사를 마친 뒤 한음이 먼저 길을 떠나겠다며 보따리를 매고 나왔다. 한음이 주막집 문을 나서려는데 젊은 부부가 뛰어나오며 한음을 붙잡았다.
“아니, 왜 그러시오?”
“봇짐이 바뀌었소, 지금 당신이 메고 간 봇짐이 내 것이오.”
젊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봇짐을 빼앗으려 들었다.
“이거 왜 이러시오? 이건 분명히 내 봇짐이란 말이오!”
한음도 기세를 꺾이지 않으려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런 날도둑놈! 남의 보따리를 제 것이라고 우기네!”
“도둑놈이라니? 내 보따리를 내가 지고 가는데 웬 참견이야?”
젊은 남자와 한음이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다 보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오성이 중간에 나서서 말했다.
“그렇게 싸울 것 없이 서로 보따리를 풀어보면 될 것 아니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한음이 보따리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오성은 한음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먼저 당신 보따리부터 풀어봅시다. 봇짐 안에 무엇이 들었소?”
“내 보따리 안에는 금불상이 들었소.”
한음이 그 말을 하자마자 젊은 부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럼 봇짐을 열어보시오.”
한음이 봇짐을 펼치자 정말로 금불상이 나왔다. 그러자 오성이 젊은 남자를 보며 말했다.
“이 사람 말대로 금불상이 나왔으니 이 봇짐은 이 사람 것 아니오? 왜 당신 것이라고 우겼소?”
“내, 내가 착각한 것 같소, 미, 미안하오.”
오성이 다그치자 그는 어물어물 대꾸하다가 자기 부인과 자리를 피했다. 오성과 한음은 그들을 붙잡아 관가에 넘길까 하다가 이 정도면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혼이 났을 것이고 아직 젊은 부부인지라 한번 기회를 주는 것도 좋을 듯싶어 그냥 내버려 두었다. 오성과 한음은 농을 주고받으며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남의 봇짐을 슬쩍 가지고 나왔으니 자네야말로 도둑이 아닌가?”
“내가 도둑이면 자네는 뭔가? 도둑과 한 패거리가 되어 일을 꾸몄으니 자네도 당연히 도둑이 아닌가? 하하하.”
“아, 관계가 그렇게 되나? 하하하.”
오성과 한음,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오한지교(鰲漢之交)라 불리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