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선생묘(徐省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3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설운동 산1-14번지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각종 변란(變亂) 때 신하로서의 맡은 바 책임을 다한 약봉(藥峰) 서성(1558~1631)을 모신 유택이다.
봉분은 호석(護石)을 높고 둥글게 하였다. 곡담은 양 머리에 장방형의 화강암을 세워 장식하였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혼유석 · 상석 · 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망주석 좌측으로 원래의 묘비가 있고, 또한 묘역 아래에는 가첨석(加檐石)을 갖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 묘역의 곡담 · 호석 · 봉분 앞의 묘비는 1968년에는 후손들이 신축 및 보수를 한 것이다.
서성은 조선 명종(明宗) 13년(1558)에 출생하여 선조(宣祖) 19년(1586)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올랐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다가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피난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으로 함께 잡힌 왕자들과 황정욱을 지략을 써서 탈출시켰다.
광해군(光海君) 5년(1613)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류되어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귀하여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 : 1587~1624)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 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정사에 힘쓰다가 인조 9년(1631)에 사망하였다. 한편 서성의 어머니는 소경의 몸으로 약현에서 술과 약과를 만들어 팔면서 서성을 공부시켰다. 서성의 호가 약봉(藥峰)인 것도 약현 지방의 약(藥)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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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서성(徐渻)
생몰연대 : 1558(명종 13)∼1631(인조 9).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언양현감(彦陽縣監) 서거광(徐居廣)의 현손이며,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서팽소(徐彭召)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이고, 아버지는 서해(徐嶰)이다. 어머니는 청풍군수(淸風郡守) 이고(李股)의 딸이다. 이이(李珥)·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1586년(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권지성균학유(權知成均學諭)가 되었다. 이어 인천부교수(仁川府敎授), 예문관의 검열·대교(待敎)·봉교(奉敎), 홍문관의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과 예조좌랑을 지냈다.
병조좌랑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다가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로 길을 바꾸었다가 국경인(鞠景仁)에 의해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황정욱 등과 함께 결박되어 가토(加藤淸正)에게 가게 되었으나 탈출하였다.
왕의 명령으로 행재소에 이르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병조정랑·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역임하고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다시 지평과 직강을 거쳐 삼남지역(三南地域)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온 뒤 전수(戰守)의 계책을 아뢰었다. 이로 인해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고, 경상감사에 발탁되었으나 대간의 반대로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바뀌었다.
그 뒤 경상우도감사로 내려가 삼가(三嘉) 악견산성(嶽堅山城)을 수리하고 민심을 진정시켰다. 이어 동부승지·병조참의·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승문원부제조(承文院副提調)를 겸하였다. 다시 병조참의·도승지·황해감사·함경감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있다가 평안감사로 나아가 평양 아전들의 환심을 얻었다.
이어 도승지가 되어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신구(伸救)하고,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 일파를 배척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았다. 이어 판윤(判尹)으로 비변사와 훈련도감의 제조를 겸하고, 형조판서·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함경감사로 나갔다.
다시 호조판서로 지의금부사를 겸하다가 경기감사가 되고, 그 뒤 우참찬을 거쳐 개성유수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단양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영해와 원주 등지로 옮겨지는 등 11년 간이나 귀양살이를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이어 형조판서·대사헌·경연성균관사를 겸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왕을 호종하고 판중추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왕을 강화도까지 호종했고,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격하였다.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이호민(李好閔)·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조직하여 역학(易學)을 토론했고, 서화(書畫)에도 뛰어났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문화재안내문안집. 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