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서원(花山書院)은 경기도기념물 제46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227-40(방축리 산16-1번지)이다.
조선 인조(仁祖) 9년(1631)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 1556~1618)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오성 대감으로 알려진 백사 선생은 선조(宣祖) 13년(1580)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참의(戶曹參議), 도승지(都承旨) 등을 거쳤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왕을 모시고 의주로 피난하였고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 1561~1613)과 더불어 명나라에 구원 요청을 주장하는 한편 임진왜란 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면서 군을 정비하고 왜적 퇴치에 주력하였다. 임진왜란 후 영의정이되어, 붕당(朋黨)에 가입하지 않고 당쟁의 조정에 힘썼으며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이 서원은 창건 후 숙종(肅宗) 46년(1720)에 ‘화산’이라 사액(賜額)되었으며 선현 배향(先賢配享)과 지방 교육에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 뒤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高宗) 5년(1868)에 훼철되어, 위패는 무덤 앞에 묻었다가 1971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인 인덕각(仁德閣)과 내신문(內神門), 동 · 서협문(夾門), 동 · 서재인 동강재(東岡齋)와 필운재(弼雲齋), 그리고 외신문(外神門) 등이 있다. 인덕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맞배지붕의 겹처마로 이루어진 건물로서 정면 각 칸에는 띠살문(세살문)을 달아 놓았다. 기둥 머리에는 보 방향으로 2단의 촛가지가 뻗은 이익공의 공포 형식을 이루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중앙에는 감실을 꾸며 백사 선생의 위패와 초상을 봉안하였다. 동강재와 필운재는 강당을 겸한 재실인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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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오성대감 이항복의 생애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은 조선 중기의 명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고려의 명재상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의 아들이다. 1580년(선조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의 혜택을 받았다. 도승지 재임 중 임진왜란으로 어가를 모시고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이르러 대책을 의논할 때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안으로는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자고 주청하여 왕이 받아들였다. 7년 전쟁 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역임한 이항복의 경륜이 적중하여 모든 일이 잘 풀렸던 것이다. 1598년 우의정이 되고 오성부원군의 봉호를 제수받고 다시 영의정에 승차하였다. 1604년 호성 일등공신에 서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임해군 살해 사건에 강력 항거하는 사직상소를 올리고 은거하니 이것이 동강재 은거이다. 은거 중 인목대비 폐모론이 일자 패륜을 깨우치도록 상소를 올리어 반대한 죄로 북청에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1618년 정월에 유배되어 5월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포천의 화산서원, 북청의 노덕서원에 배향되었다.
이항복(오성)과 이덕형(한음)은 죽마고우인가?
이 두 사람은 포천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사람이다. 아마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근거 없이 세상에 퍼진 두 사람에 얽힌 일화·전설의 내용에 기인한 것으로 유추된다. 어린 시절 죽마고우로 이웃에서 자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풍자, 그리고 재치와 해학이 흘러넘치는 재담과 작희의 주인공이었다는 이야기에는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분명히 죽마고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항복은 조상 대대로 포천시 가산면이 고향인데, 그는 부친의 내직 임직으로 1556년(명종 11)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이덕형은 양평이 고향인 사람으로 포천과 연관이 있다면 외가가 포천 자작동이라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겠고, 『한음문고』 서문과 한음 연보에 “공은 한양의 남부 성명방 외제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명방’은 필동에서 남대문까지의 남산골을 가리키는 것이니 이덕형도 한양에서 출생한 것이다.
두 사람은 1578년(선조 11) 생원시·진사시에 함께 합격하면서 교분을 맺었으니 이항복 23세, 이덕형 18세의 청년 시절이었고 1580년에 이항복은 알성문과 급제, 이덕형은 별시문과 급제로 사가독서를 하면서 더욱 돈독한 동지가 되었다고 본다. 물론 이덕형이 소년시절 자작동 에서 글을 읽으며 공부하고 양사언을 따라 시문을 연마하는 등 포천에 왕래는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두 사람은 심오한 경륜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사직을 바로잡아 역사에 그 명성을 남겼다.
오성과 한음 관련 문화재는 이항복선생묘(경기도기념물 제24호), 화산서원(경기도기념물 제46호), 용연서원(경기도유형문화재 제70호)등이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
『경기지역의 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