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단(忠穆壇)은 경기도기념물 제10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소흘로116번길 13(무봉리 27번지)이다.
이 곳은 조선 세조(世祖)에게 폐위(廢位)당한 단종(端宗 : 1441~1457)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처형된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분인 유응부(兪應孚 : ?~1456)와 한남군(漢南君) 이어( ?~1457), 그리고 병사(兵使) 양치(楊治 : ?~1456)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신 제단이다.
이 곳에는 유허비(遺墟碑)를 비롯한 설단비(設壇碑)와 비각(碑閣)이 있다. 유허비는 영조(英祖) 22년(1746)에 조성되었으며 이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정면, 측면 각 1칸 규모인 정방형의 사모지붕 형태이다. 지붕의 중앙에는 절병통을 올려 놓았고 사방 측면의 기둥 사이에는 하단에서 반 가량 벽을 치고 그 이상은 문살 모양의 살창을 조성했다. 중앙에는 이분합(二分合)의 판문(板門)을 달아 놓았다.
비단(碑壇)은 외벌대로 단을 쌓고 대지를 마련하려 3기의 비석을 세웠는데 중앙에 ‘총관유응부선생(摠管兪應浮先生)’의 비석이 있고 그 좌우로 ‘병사양치선생(兵使楊治先生)’, ‘한남군이어선생(韓南君李어先生)’의 석비 하나씩을 세웠다. 매년 가을에 유림들이 이 곳에 모여 제향(祭享)을 올리고 있다.
충목단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864년(고종 1)에 폐쇄되었다가 1890년(고종 27) 복원하여 한남군 이어와 퇴은공 양치를 추가 배향하였다.
(자료출처 : 포천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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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 포천시청
유응부(兪應孚 )
생몰연대 : ?∼1456(세조 2)
단종을 위해 사절(死節)한 사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기계(杞溪, 혹은 川寧).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포천 출신.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모두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무과에 올라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49년 경원도호부사·경원절제사, 1452년(단종 즉위년) 의주목사를 거쳐 1453년 평안좌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를 거쳐, 이 해 윤6월에 세조가 즉위한 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 2)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成勝 : 성삼문의 아버지) 등을 별운검(別雲劒 : 2품 이상의 武官이 칼을 차고서 임금 옆에서 호위하던 임시 벼슬)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雲劒)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하였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公)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羽翼 : 보좌하는 신하)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千載一時)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이 때 동모자(同謀者)의 한 사람인 김질(金礩)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 : 대등한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세조를 가리켜 부른 말)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김질을 가리킴)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정상(情狀)을 신문했으나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는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남효온(南孝溫)이 ≪추강집≫의 <육신전 六臣傳>을 지으면서 단종복위의 거사 주모역은 성삼문·박팽년이고, 행동책은 유응부로서, 이 세 사람이 한 일을 삼주역(三主役)으로 부각시켰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남효온의 <육신전>이 세상에 공포된 뒤 그대로 확정되어, 1691년(숙종 17)에 사육신의 절의를 국가에서 공인해 성삼문·박팽년·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 등 6인의 관작을 추복(追復)시켰다. 그 뒤 1791년(정조 15)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적에도 사육신으로 재차 확정되었다.
노량진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의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대구의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의 충렬사(忠烈祠), 강령의 충렬사 등에 제향되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양치(楊治)
조선 전기 포천 지역에 은거한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퇴은(退隱). 증조할아버지는 도첨의 시중 양기(楊起)이며, 할아버지는 찬성사 양지수(楊之壽)이고, 아버지는 경안공(景安公) 양천진(楊天震)이다.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꼽히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아들이다. 세종 대 단종의 유모였던 양혜빈(楊惠嬪)의 숙부이기도 하다.
양치(楊治)[1400~1483]는 세종 연간 김종서(金宗瑞)가 여진족을 토벌하여 6진을 개척할 때 종사한 공을 인정받아 함경도 병마절도사, 황해도 병마절도사, 영암 군수 등을 지냈다. 세조가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관직을 버리고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틀무시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였다.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에 있다.
정조 때 단종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 포상 받았으며, 1988년 3월 21일 사육신 중 한 명인 유응부(兪應孚)를 봉향하는 충목단(忠穆壇)에 추배되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