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평대군묘및신도비(麟坪大君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13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로222번길 12-49(신평리 산46-1번지)이다.
조선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이며 효종(孝宗)의 동생인 인평대군 이요(李㴭 : 1622~1568)를 모신 유택이다.
묘역은 곡담으로 둘러져 있고, 봉분은 단분으로 원형의 호석(護石)이 둘러져 있다. 복천부부인(福川府夫人) 오씨(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효종 9년(1658)에 건립된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가까이 있다. 상석을 받치고 고석(鼓石)에는 사면에 양각으로 사자상(獅子像)을 조각해 놓았다. 상석에 근접하여 좌우로 동자상이 위치하며 전방에는 장명등이 있다. 상석과 장명등을 중심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역 후면 우측에는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석물과 묘역 우측 하단에는 제물(祭物)을 올릴 때 사용하는 판석이 놓여 있다.
신도비는 묘역 입구에 세워졌는데 높이 325cm의 거대한 규모이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생동감이 넘치는 정교한 모습이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1,800여 평의 규모로 매우 장대한 편이다. 특히 묘역 하단에는 효종 · 숙종(肅宗) · 영조(英祖) · 정조(正祖)의 어제친필(御製親筆)로 된 치제문비(致祭文碑)를 포함해서 2기의 치제문비가 인평대군의 업적을 예찬하고 있다.
인평대군은 인조 18년(1640)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효종 원년(1650)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왕자의 신분으로 병자호란(1636~1637)후의 국난 극복에 헌신하였다. 시서화(詩書畵)에 뛰어났으며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도 정통하였다.
(자료출처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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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홈페이지)
인평대군(麟坪大君)
생몰연대 : 1622(광해군 14)∼1658(효종 9)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요(㴭), 자는 용함(用涵), 호는 송계(松溪).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1628년 7세 때 인평대군(麟坪大君)에 봉해졌다.
1640년 볼모로 심양(瀋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1650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시서화(詩書畫)를 잘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에도 정통하였던 그는,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내조(來朝)하였다가 3년 뒤에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인 화가 맹영광(孟永光)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희귀한 편으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산수도」, 홍성하(洪性夏) 소장의 「노승하관도(老僧遐觀圖)」, 정무묵(鄭武默) 소장의 「고백도(古栢圖)」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백도」는 섬세하고 꼼꼼한 필치로 다루어져 있어 맹영광의 공필법(工筆法)과 상통하는 바 크며, 「산수도」의 다소 거치른 필치 등은 절파풍(浙派風)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 이외에 『송계집』·『연행록(燕行錄)』·『산행록(山行錄)』의 저서를 남겼다.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 묘제 석조 미술 . 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