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금현리지석묘(抱川金峴里支石墓)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304-10번지이다.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포천금현리지석묘는 원래의 겉모습이 잘 남아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길이가 5.5m에 이르는 덮개돌이 3개의 받침돌(높이 약 1.2m) 위에 놓여 있으며, 매우 안정된 느낌을 갖도록 축조되었다. 받침돌의 길이축은 유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흐르는 우금천의 물흐름 방향과 일치한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1980년대 초 남쪽에 받침돌을 세웠으나 1997년에 이 받침돌을 치워버렸다. 이 고인돌은 일제시대에 이미 도굴되었다. 당시 도굴에서 어떤 유물이 나왔는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이 동네의 마을 행사가 있으면, 먼저 이곳에서 제를 올리며 행사가 시작된다. 그리고 집 안의 잡귀를 쫓는 굿도 반드시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마을 사람들은 전한다. 금현리 고인돌은 현재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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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포천시청
포천 금현리 지석묘는 받침돌 3매가 남아 있는 탁자식 고인돌이다. 돌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덮개돌의 평면 형태는 마름모꼴이며, 장축 방향은 남북을 향하여 포천천의 흐름과 일치한다. 덮개돌의 규모는 430×347×55㎝이다. 받침돌은 모두 3개가 있으며, 남쪽으로 1매의 석재가 묻혀 있다. 현재 확인되는 크기는 대략 80×60㎝ 정도인데, 고인돌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북쪽 받침돌은 100×144×20㎝ 크기이며, 내면 상단에는 단을 마련하여 바깥쪽의 일부만 덮개돌과 닿게 치석하였다. 북쪽 받침돌과 동서 받침돌은 현재 틈이 벌어져 있으며 원래 맞닿는 곳을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다. 한편, 동쪽 받침돌은 북쪽 받침돌로부터 10㎝가량 북쪽으로 나왔으며, 크기는 265×144×33~55㎝이다. 서쪽 받침돌은 37㎝가량 북쪽으로 나와 있는데, 크기는 230×144×30㎝이다. 서쪽 받침돌의 외면은 30~10㎝ 정도 덮개돌과 틈이 나 있다.
덮개돌 북쪽과 남쪽 면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이다. 서쪽과 동쪽 면 끝 부분에는 채석한 흔적이 뚜렷하다. 특히 동쪽 면 끝단은 돌을 떼어 낸 후 각진 부분을 부드럽게 치석하였으며, 서쪽 면은 각진 상태에서 윗면만을 살짝 다듬었다. 남쪽 면은 전체적으로 자연 상태로 보이는데, 부분적으로 치석한 흔적이 보인다.
서쪽면의 위, 아랫면에는 작은 쐐기흔이 10여 개 관찰된다. 아랫면은 떼어 낸 부분을 매끄럽게 다듬기 위해 쐐기를 박아 한 번 더 채석하였다. 서쪽 받침돌의 남쪽 끝 부분에는 총알 자국 10여 개가 관찰된다. 동·서쪽 받침돌의 남쪽 끝부분에도 마감돌을 맞춰 세우기 위해 치석한 흔적이 보인다. 동쪽 받침돌은 북쪽이 더 두꺼운 형태이고 약간 기울어져 있어 서쪽 받침돌과의 거리가 다르다. 즉 현재 동·서쪽 받침돌 사이 하단 거리는 135㎝, 상단 거리는 118㎝이다.
『문화재안내문안집. 2』
『경기도 고인돌』
『(포천의 역사를 찾아 떠나는) 문화유적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