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오두산성(坡州 烏頭山城)은 사적 제35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69-1이다.
오두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으로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오두산성은 해발 119m의 강안(江岸) 단일 구릉으로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동남부에 소재하였다. 서북쪽으로는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의 남단이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 있다. 서쪽으로는 김포시 하성면의 북단이 한강 건너로 보인다. 동쪽은 탄현면의 성동리 일대이고, 동남쪽은 검단산이다. 오두산은 남쪽의 최고봉을 중심으로 한 봉우리와 북쪽으로 이어지는 줄기가 있다. 산성은 정상부의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8부 능선을 따라 퇴뫼식으로 축조하였는데 외성벽 둘레는 1,228m이다.
통일동산 조성 사업에 따라 1990년에 경희대학교 고고미술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한 후 1991년에는 일부 구간에 대한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하였고, 1992년에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2006년에는 통일전망대측의 요청과 문화재청의 오두산성 정비 결정에 따라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에서 동벽 유구를 조사하였다. 2007년에는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해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오두산성을 백제 관미성(關彌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관미성은 ‘사면이 초절하고 바닷물이 둘려있는데, 광개토왕이 군사를 7도(道)로 나누어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하였다’라 했다. 이러한 관미성 입지적 조건은 밀물 때 바닷물이 밀려들어오는 오두산성과 연결된다. 그러나 관미성은 말갈의 침공로이기도 한 백제 동북의 관미령(關彌嶺)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되었을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켜 주는 지역으로는 예성강 중류 지역과 그 지류인 마탄(馬灘)을 끼고있는 남안(南岸), 특히 남천(南川)과 금천(榨川)구간이 지목된다.
이 구간은 평양과 개성을 연결시켜 주는 요로(要槛)이기도 하거니와 바닷물이 경도 127° 선의 동쪽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그 밖에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14년 정월 신묘조」에는 ‘옹진성 곁에 옛 토성 자리가 있는데 3면이 바다에 닿고 지세가 험해서 의지할 만합니다. 이곳에 성을 쌓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기록이 주목된다. 옹진반도에 소재한 이 토성은 사면이 절벽이요 바닷물이 둘러져 있다는 관미성의 지세와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토성은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 부근에서 연평도와 백령도 연안을 지나 황해도 은율 앞바다에 소재한 초도(椒島)를 중간 기항지로 하여 올라가는 노철산수도(老鐵山水道)나, 서해 연안을 따라 올라 가다가 초도에서 꺾어져 산동반도 끝의 적산(赤山)으로 직통하는 적산항로라는 중국대륙과 통하는 양대 수로를 관장할 수 있는 요진(要鎭)이었다. 그러므로 옹진반도 끝에 축조된 이 성이 해도(海島)도 아니면서 바다까지 통제할 수 있는 요진이요 군항(軍港)이었으므로 관미성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구조로 밝혀졌다. 정상 최북단에 중첩된 3곳의 각루(角槰) 가운데 바깥쪽 두 곳은 원래 성벽과 그에 부속된 각루 보다 후대에 증축된 것이다. 각루의 가장 바깥쪽 벽은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15단으로 축조했는데 높이는 170㎝이다. 서쪽은 자연 암반층을 고스란히 이용했다. 다른 각루의 축조 방법과 규모도 이와 비슷하다. 북동의 석축부는 50×15㎝ 정도로 다듬은 판석을 9단으로 엇갈려 쌓고 그 위에 점토로 판축하였다.
석축 최하단부에는 판축과 관련된 320㎝ 간격의 영정주(永定柱), 420㎝ 간격 쐐기돌이 보이며 판축토 사이에는 15×13㎝, 두께 7~8㎝ 크기의 강돌이 박혀 있다. 이 강돌은 유사시 무기로 사용할 목적으로 보인다. 석축 높이는 135㎝ 정도이며, 판축은 현재 50㎝ 정도 남아있다. 동쪽 성벽은 하단의 암반을 편편하게 고른 다음 그 위에 장방형 석재의 가로쌓기 형식으로 축조하였다.
동남쪽으로 뻗은 중간 능선 좌우 계곡 내만부에는 3~4능선 상에 석축 흔적이 보인다. 능선의 우측 계곡은 문터가 확인된다. 성의남쪽 좌측 계곡으로 이어진 소로를 따라가면 불연속한 석축이 눈에 띈다. 석축 구간 중 계곡의 중간 지점에는 수구를 설치한 평탄면이 남아있다. 수구를 중심으로 좌우 비탈면을 이용하여 출입할 수 있는 소로 수문 좌측 평탄면에는 기와편이 층층으로 쌓여 있는데 건물터인 것이다. 또 원형으로 된 석축 우물이 남아 있는데, 깊이는 220㎝, 지름 115㎝ 규모로 정교하게 쌓았다.
하단부는 8각형, 윗부분은 원통형으로 16층을 쌓았는데 상부 3·4층은 교란되었다. 우물에는 현재도 맑은 샘물이 고여 있다. 우물의 좌측에는 계곡 위에서 내려오는 물을 수로를 두어 처리했다. 우물은 중앙으로 3~4단씩 층단을 이루어 쌓은 흔적이 남아 있고 양측부는 흔적이 없으나 측벽을 두고 층단식으로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우물 일부에서는 할석으로 축조한 측벽이 남아 있기도 하다.
오두산성 동남 계곡의 동측 비탈사면에 길이 30m, 너비 6m 규모로 성벽처럼 쌓은 축대가 있다. 이 축대를 통과하면 계곡 중간에서 능선 정상으로 외성을 축조했다. 성의 좌측 능선 정상은 각루의 형태이다. 조사 결과 성벽은 기초 다짐이 없이 평탄면을 고른 후 판상석으로 기단 굴도리를 쌓아 올리고 그로부터 안쪽으로 약 1m 뒤로 체성(體城)을 쌓았다. 성의 적심은 크고 작은 할석으로 막채움한 형태이다. 주공(柱孔)은 면석을 쌓을 때나 다른 성의 시설을 설치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210㎝ 간격으로 면석과 10~20㎝ 떨어져 대략 11개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출표된 유물은 대호편·명문동체편·토기저부편·기와편·방추차·철촉 등이 있다. 대호편은 회청색과 흑색 경질의 대호편의 경부 일부만 남아 있다. 경부에는 2줄의 파상문이 새겨져 있고 동체와의 접합부에 1개의 돌대를 돌렸다. 동체 외면에는 격자문과 사격자문을 타날하였다. 혹은 경부에는 3조의 파상문과 조의 횡선이 새겨져 있고, 동체와의 접합부에 1개의 돌대를 돌린 경우도 있다. 내면에는 빗질한 흔적이 확인된다. 명문동체편은 흑갈색 경질토기동체편 겉면에 ‘병삼십입(甁三十入)’라는 명문(銘文)이 있다. 제작처에서 병 30개를 납입했음을 뜻한다. 내외면에는 회전물손질 흔적이 보이며, 외면에는 5조의 침선이 돌아 간다. 정선된 태토에 소량의 가는 모래알이 섞여 있다. 토기저부편는 회색 경질토기와 흑회색 경질토기 저부편 등이 출토되었다. 저부는 평저인데, 태토가 정선되어 있다. 그 밖에 대소 3개의 구멍이 남아 있는 회색연질 시루 저부편이 출토되었다.
기와편은 암키와편의 경우 황갈색과 흑회색으로 외면에는 기하학 문양이나 수직문과 어골문의 복합문, 혹은 장방형의 사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 내면에는 마포흔과 포목접합 흔적이 종방향으로 남아 있다. 태토는 정선되었고, 소량의 가는 모래알이 섞여 있다. 수키와편은 회색인데, 외면에는 장방형의 사격자문이나 수직문, 혹은 사선문과 격자문의 복합문이 시문되어 있다. 내면에는 마포흔과 사선 방향의 포목접합 흔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와들은 백제때 것이지만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와편의 명문 가운데는 상초(上草)·초하(草下)·천정(泉井) 등의 글자가 보인다.
산성은 통일전망대 조성과 인근 군부대의 공사 등으로 제대로 조사되지 못했다. 현재 통일전망대 이외의 지역은 군사 시설인 관계로 산성에 대한 접근이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2권(증보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경기도의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