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花石亭)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6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 152-72이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명상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강가의 벼랑 위에 위치하고 있다. 화석정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면 서울의 삼각산(三角山)과 개성의 오관산(五冠山)이 아득하게 보인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는 율곡의 선대가 대대로 살아 온 마을이다. 그의 호 ‘율곡’ 또한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율곡리는 마을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임진강 절벽 위에는 화석정이 자리 잡고 있다. 원래 고려 말의 문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유지(遺址)였던 이 자리에 조선 세종 25년(1443)에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처음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선생의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고 몽암(夢菴)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정기(亭記)에 의하면 중국 당나라 때 재상 이덕유(李德裕)의 별서(別墅)인 평천장(平泉莊)의 기문(記文) 중에 보이는 ‘화석(花石)’을 따서 정자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그 후 율곡이 다시 중수하여 사용하던 이 정자는 당시에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음시청유(吟詩淸遊)하였다고 하는 설이 있다. 또한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의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은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난 가던 중 한밤중에 강을 건널 때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혔다는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임진왜란(1592) 때 불에 타 없어진 화석정은 그 후 80여 년 동안 터만 남아 있다가, 현종 14년(1673)에 율곡의 증손인 이후지(李厚址),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졌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짓고 1973년 정부의 율곡 선생 및 신사임당 유적 정화 사업 때 건물에 색을 다시 칠하고 주위를 정리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건물이다. 사각형의 방주(方柱)에 내부는 우물마루로 짜여 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주두(柱頭)가 없이 그대로 대들보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소로수장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기둥 사이의 수평재인 창방 위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화반(花盤)을 놓아 상부 하중을 받고 있다. 건물의 내·외부에는 화려한 단청을 했고 건물의 정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화석정(花石亭)‘ 현판이, 내부에는 이이가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 있다. 또한 정자 안에는 ‘화석정중건상량문(花石亭重建上樑文)’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파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내용 더보기
※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이이(李珥, 1536∼1584)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표이자 경세가·정치가·학자로 우리나라 성현 중 으뜸가는 인물이다.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동해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했으며, 이이를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다.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인데 그 중 율곡이 가장 많이 불린 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우리나라 여성의 표상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이이는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파주 율곡리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시(花石亭詩)’를 지었으며 13세의 나이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듬해에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이황을 경북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理氣)를 논하였는데, 퇴계는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가 두렵다)’라 하여 그의 재능에 탄복했다고 한다. 1561년 부친상을 당했으며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아홉 번에 걸쳐 각종 시험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 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관직으로는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565년 예조 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쳤으며 1571년(선조 4)에는 청주목사로 부임, 청주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동향의 성혼(成渾)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1574년 3월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고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왔으며, 1577년 해주 석담으로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다.
1580년 12월 대사간에 다시 임명된 뒤 이듬해 6월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예문관제학을 겸하였고 10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11월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582년(선조 15) 1월 이조판서에 올라 문관의 인사행정을 총괄하고 7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어 바쳤다. 그 해 8월 형조판서, 9월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우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12월 병조판서를 맡고 이듬해 북쪽에 호변(胡變)이 일어나자 군정의 책임자로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 입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그의 예언은 과연 적중했던 것이다. 1583년 9월 판돈녕부사에 제수되고 곧이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하여 힘쓰다가 1584년 1월 49세로 세상을 떠나 본향인 파주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되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파주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