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이이 유적(坡州 李珥 遺蹟)은 사적 제52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이다.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유적지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출생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차례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으며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 병조,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선생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대동법, 사창실시 등에 노력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문묘에 배향되었다.
이 곳에는 율곡 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선생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그 밖에 이이선생 신도비 등이 있으며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자운서원, 율곡이이묘, 신사임당묘가 각각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이이 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사적 제525호 파주 이이 유적으로 승격되었다.
(자료출처 : 파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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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파주시청 / 경기문화포털
이이(李珥, 1536∼1584)
이이는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표이자 경세가·정치가·학자로 우리나라 성현 중 으뜸가는 인물이다.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동해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했으며, 이이를 낳은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다. 자(字)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인데 그 중 율곡이 가장 많이 불린 호이다.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우리나라 여성의 표상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이다.
이이는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파주 율곡리 화석정에 올라 ‘화석정시(花石亭詩)’를 지었으며 13세의 나이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듬해에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이황을 경북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理氣)를 논하였는데, 퇴계는 ‘후생가외(後生可畏, 후배가 두렵다)’라 하여 그의 재능에 탄복했다고 한다. 1561년 부친상을 당했으며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이후 아홉 번에 걸쳐 각종 시험에 모두 장원하여 ‘구도장원 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관직으로는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작으로 하여 1565년 예조 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거쳤으며 1571년(선조 4)에는 청주목사로 부임, 청주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동향의 성혼(成渾)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1574년 3월 사간원 대사간을 지내고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으나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돌아왔으며, 1577년 해주 석담으로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향약(海州鄕約)」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다.
1580년 12월 대사간에 다시 임명된 뒤 이듬해 6월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예문관제학을 겸하였고 10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11월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다. 1582년(선조 15) 1월 이조판서에 올라 문관의 인사행정을 총괄하고 7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과 『김시습전(金時習傳)』,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지어 바쳤다. 그 해 8월 형조판서, 9월 의정부 우참찬을 거쳐 우찬성으로 승진하였으며 12월 병조판서를 맡고 이듬해 북쪽에 호변(胡變)이 일어나자 군정의 책임자로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 입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그의 예언은 과연 적중했던 것이다. 1583년 9월 판돈녕부사에 제수되고 곧이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동서 분당의 조정을 위하여 힘쓰다가 1584년 1월 49세로 세상을 떠나 본향인 파주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되었다.
자운서원(紫雲書院)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효종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 39년(17B)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 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적은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 곳의 건물은 모두 근래에 지어져 고풍스러움은 없으나 강당의 양 옆에 심어진 두 그루의 느티나무는 서원의 내력을 그대로 말해주듯 고목으로 서 있다.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
자운서원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의 자운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전체 높이가 3.87m이며, 비의 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랫단은 두꺼운 판석 4장으로 짜 맞추어 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복련문(覆蓮紋)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紋)과 괴운문(怪雲紋)이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으며 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비의 상단에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라는 전액(篆額, 머리글)이 쓰여져 있으며 비문 끝의 ‘숭정56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 수 있다.
율곡이이묘(栗谷李珥墓)
서원 옆 자운산 자락에는 이이를 비롯한 가족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 공간은 서원 동쪽의 여현문(如見門)을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가족묘역에는 신사임당 묘를 비롯하여 가족묘 13기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그 중 중심 묘역에는 모두 4기의 묘가 위치하는데 아래로부터 율곡의 아들 이경림(李景臨)의 묘, 부모 합장묘, 큰 형인 이선(李璿)의 묘가 자리하고 맨 위에 율곡의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묘소 뒤로 부인 곡산 노씨의 봉분이 있다. 묘역을 찾는 사람들은 부모의 묘와 자식의 묘가 상하 배열이 맞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궁금해 한다. 즉 두 아들이 부모의 묘소 위에 위치하니 이른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장(逆葬) 개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이가 살다간 조선 중기는 이처럼 역장의 개념이 없던 시기이며 다만 풍수에 의한 묘 터를 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묘 오른쪽에는 묘비가 있고, 좌우로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이 한 쌍씩 있는데,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이다. 후대에 묘비 1기가 추가되었다.
신사임당묘(申師任堂墓)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율곡이이(李珥)의 어머니인 신사임당(1504∼1551)의 묘소이다. 신사임당은 평산 신씨로 조선 연산군 10년(1504)에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아버지 진사(進士)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 이씨 슬하의 무남 5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세 때 이원수에게 출가하였는데 친정에 아들이 없어서 남편에게 동의를 구한 뒤 친정에 머물렀다. 그 후 시댁의 오랜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였고 38세가 되어서 서울 수진방 시댁에서 시댁살림을 주관하고 슬하에 4남 3녀를 둔 다복한 생활을 하였다. 본명은 신인선(申人善)이고 사임당은 당호(堂號, 이름대신 허물없이 부르거나 쓰기 위해 지은 이름)로써, 최고의 여성상인 중국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사임당은 어려서 경전(經典)에 능통하였으며, 7세 때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본보기로 삼아 배웠다고 한다. 그림의 주제는 풀, 벌레, 포도, 꽃, 물고기, 매화, 난, 산수 등인데 풀벌레 그림은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았다는 일화가 있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정교함을 발휘하는 그의 화풍은 따를 자가 없었고, 필법(筆法)도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들 이이는 유학의 대가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이어받은 예술가로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 남편을 잘 보필한 아내로서, 그리고 교양과 학문을 갖추고 천부적 소질을 발휘한 예술가로서 우리나라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묘는 남편 이원수(李元秀)와 합장묘이다. 묘역은 둔덕도 없이 봉분 앞 중앙에 묘비가 있고 묘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일렬로 놓여있고 좌우에는 키 작은 문인석 1쌍이 자리 잡고 있다. 후에 새로 세운 까만 돌(烏石)로 만든 묘비 1기가 묘 뒤편에 있으며, 상석 앞부분은 화강암 바닥으로 단장하였다.
율곡이이신도비(栗谷李珥神道碑)
율곡이이신도비는 자운서원 경내의 좌측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조선 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이 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가신지 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파주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