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정정공파묘역(坡平尹氏貞靖公派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8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성재길 220이다.
파평윤씨(坡平尹氏) 정정공파(貞靖公派) 묘역(墓域)은 교하읍 당하리, 와동리 일대 파평윤씨 교하종중의 선산(762,413㎡)에 분포하고 있는 중시조 정정공(貞靖公) 윤번(尹磻, 1384~1448)을을 비롯하여 그의 수많은 후손들의 묘역 약 600여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역에서 옛날 석물이 남아있는 묘역은 약 50여기가 조사되었으며, 그 중 중요 묘역 96기가 최근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들 묘역은 조선시대의 묘역이 한 종중에 의해 연대별로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묘역의 역사적 계기성(繼起性)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지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곳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묘제 및 석물, 각종 묘비 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시대별 묘제의 특징과 성격을 보여주며 또한 역사적, 미술사적, 복식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 이라 할 수 있다.
이 곳에 분포하는 묘역 중 주요한 묘를 보면 조선초 세조대왕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부친 윤번 묘와 중종의 비 장경왕후 윤씨의 부친 윤여필(尹汝弼, 1466~1555) 그리고 역시 중종의 비 문정왕후 윤씨의 부친 윤지임(尹之任, ?~1534) 묘 등 부원군 묘역 3기를 중심으로 정승 묘역7기, 판서묘역 8기, 참판묘역 30기 등이 분포하고 있다.
이 중 윤번과 그의 묘역에 대해서만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윤번은 고려말 판도판서(版圖判書) 승례(承禮)의 아들이다.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신천현감을 거쳐 1428년 군기시판관을 역임하였다. 딸이 수양대군의 부인이 되자 군기시부정에 승진되고 이어 공조참의가 되었다. 1434년 이조, 호조의 참판, 경창부윤을 거쳐 1439년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냈다. 1440년 우참찬, 공조판서에 이어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풍병으로 사직하고 1447년 판중추부원사가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그의 묘역은 2기로 상단에 윤번의 묘역이 있고, 약 30m 하단에 부인 인천이씨의 묘역이 있다. 봉분은 모두 장대석을 이용한 방형(方形)의 호석(護石)을 두른 방형봉토분(方形封土墳)으로, 비교적 대형의 호석을 이용한 봉분이다. 묘역의 계체석은 3계단으로 묘역을 상계(上階)·중계(中階)·하계(下階)로 구분한 능원(陵園)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윤번의 묘비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로 1448년(세종 30)에 예장(禮葬)후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천이씨의 묘비는 말각형(抹角形) 비신(碑身)과 비대(碑臺)로 구성되어 있고, 1456년(세조 2)에 예장(禮葬)후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묘역은 윤번의 묘역보다 8년 후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천이씨 묘역의 석물들은 대체로 윤번의 묘역에 있는 석물보다 규격 및 조각기법에 있어서 크고 정교하며 양질의 석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인천이씨가 세조(世祖)의 장모로서 세조의 등극이후인 1456년에 예장후 조성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인천이씨 묘역에서 출토된 청화백자 지석(誌石)은 1456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최고(最古)의 청화백자로서 우리나라 청화백자 제작기원을 밝히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자료출처 : 파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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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조선시대 대표적 산송분쟁 ‘조상묘 다툼’ 해결되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산송(山訟) 분쟁인 파평 윤씨 윤관(尹瓘) 묘역과 청송 심씨 심지원(沈之源) 묘를 둘러싼 분쟁이 최근 해결되었다. 2008년 5월 영의정 심지원 묘를 비롯한 청송 심씨 묘역이 인근으로 모두 이장되었다. 400여 년 넘게 끌어온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간의 갈등이 해결된 것이다.
이 사건의 해결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해외까지 화제가 되었다. 그만큼 보기 드문 역사적 사건이란 점이 세인의 주목을 끈 것이다. 세계 유력 통신인 로이터 통신은 윤씨와 심씨 문중의 이른바 ‘조상묘 다툼이 400년 만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면서 묘지분쟁의 역사를 해외토픽으로 보도하기까지 했다. 국내 언론과 방송, 각종 온라인 매체에서도 이 사건의 해결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즉 400여 년 전 발단이 된 분수원 산송이 마침내 그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산송 가운데 분수원 산송은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두 명문벌족(名門閥族) 간의 산송으로, 지방관서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중앙으로 이첩돼 임금이 친히 재조사를 명하고 심리 판결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산송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문중 간의 산송분쟁 발단은 1763년(영조 39) 5월 고양군수 신희가 경기감사 홍낙성(洪樂性)에게 첩보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신희는 첩보에서 “심정최의 조부 고 영의정공 묘의 바깥에 있는 계단의 지형이 자못 높아 마치 돈대의 모양이었고, 망주석 등의 돌들이 모두 돈대 위에 있었습니다. 돈대 아래에는 묘가 하나 있는데, 이것은 곧 풍덕에 사는 양반 이씨의 10대조 예빈시 소윤의 묘라고 하였습니다. 윤일과 윤재임 및 기타 여러 윤씨가 파헤친 곳은 곧 이가 십대조의 묘였습니다. 윤씨가 바야흐로 이가 사람들과 함께 자리하고 서로 의논하여 광속을 파헤치기로 하였습니다. 아래쪽으로 삼분의 일 거의 어깨 깊이로 팠다가 도로 흙으로 메워 금정기(金井機)의 터와 나란하게 고르고 그 옆을 막았는데…(중략)…여러 심씨는 윤씨들이 서로 통하지 않고 경내 여러 곳을 멋대로 파헤쳐 크게 사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윤씨로서는 통보를 했다고 하지만 윤씨들의 말이 서로 같지 않아 이 때문에 다투고 있는데 그 간의 실상 중에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라며 전말을 가려줄 것을 첩보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기감사 홍낙성은 “지금 보고한 것을 보니 윤가 집안의 소행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의 선산을 찾는 것이 비록 매우 급한 일이나 묘의 계단 근처를 파헤치는 죄는 절로 그 법률에 저촉된다. 남의 산소 17보에서 20보 이내를 두루 파헤쳤으니 비록 주인없는 오래된 묘라 누구의 것인지 근거할 자취가 없다 하더라도 무단히 파헤치면 옳지 않은 일이다. 이가의 소행에 있어서는 비록 사람의 이치로 책망할 수는 없지만 윤가가 남의 선산을 파헤쳐 어깨 깊이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곧 묘를 파헤친 것과 같다. 그 여러 번의 위법은 평범하게 처리할 수 없다. 윤가는 우선 엄하게 가두고 서로 말이 같지 않은 곡절이 어떠한지 일일 이 사실을 조사하여 첩보할 것이며, 이가로서는 남의 선산을 찾는다고 하여 그의 선조 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멋대로 파헤치는 모습을 앉아서 보았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풍교의 도리를 바르게 하는 데 있어 또한 평범하게 처리할 수 없으니 우선 엄한 형벌을 한 차례 가하라. 윤가는 비석과 지석 등의 물건을 증빙하지 못하였으니 그 허망(虛妄)하게 법을 업신여긴 죄상은 불문가지이다. 당초에 심씨의 산에 지시한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일을 시작한 윤가에게 조사하여 그로 하여금 지명하여 직접 보고하게 하며 일체를 잡아 가두고 일일이 다시 조사하여 의견을 아울러 성화 같이 첩보해야 마땅할 것이로다.” 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고양군수 신희가 파평 윤씨의 인척이라는 사실이 보고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즉 처음 심씨 문중의 고발로 신희가 담당하여 세밀한 조사까지 하였는데, 신희가 사적으로 파평 윤씨와 인척관계에 있다 하여 산송 담당을 기피하였고, 이에 경기감사는 파주목사 조덕상(趙德常), 교하군수 홍정유(洪鼎猷)에게 해결을 지시하였으나 이들 역시 윤씨 집안의 외손이 된다며 판결을 기피, 도(道)에 반송하고 만다.
이처럼 상황이 복잡해지자 도에서는 “세 읍의 사관이 모두 인척의 혐의가 있다고 해서 이와 같이 중요한 송사에 대해 날짜를 지연할 수 없으므로 사관을 다시 정하여야 한다. 서울에 정문(程文)하겠다는 의견을 소송의 양쪽 집안에 통지하여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제사(題辭)하였다.
영조의 현명한 정치적 판결에도 불구하고 갈등 지속
일련의 과정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지방수령들이 모두 산송 당사자인 두 종중 간의 친인척 관계로 판결을 회피하고 있으나, 그 내면에는 당시 중앙권력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던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의 권력다툼에 대해 일개 지방관아 수령이 판결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산송은 중앙으로 이첩되어 임금인 영조의 판결을 청하게 된다.
분수원 산송은 두 명문벌족 간의 묘지분쟁 사건으로 국왕의 친재(親裁)까지 가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산송이다. 그러나 일개 묘지분쟁이 국왕의 친재까지 가게 된 상황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두 가문 간의 산송문제에 대해 고양·파주·교하 등 해당 관할 지방관서에서 재판을 기피하였는데, 당시의 지방관서 수령들은 두 가문이 당대 명문 벌족이요 또 혼인관계에 얽힌 친인척 관계라는 점 등을 이유로 직접 판결을 할 수 없는 곤란한 입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앙으로 이첩된 이 사건은 영조의 친재가 이루어 졌고, 영조는 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면밀한 조사를 지시하였으며 조사결과 특별한 사항이 없다고 판단한 영조는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정치적인 판결을 내린 것으로 보여진다. 즉 영조의 입장에서 보면 윤관은 전조(前朝)의 역사적 인물이요, 심지원은 금조(今朝)의 덕망 높았던 명신인 데다가 윤·심 양 가문은 국초 이래 명문벌족으로 두 집안 모두 왕실과 국혼을 많이 한 집안이라는 점때문에 임금으로서도 어느 한 가 문의 손을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영조의 판결은 “위에 모셔져 있는 심 만사공의 묘는 그대로 받들고 아래의 묘는 윤 문숙공의 묘로 받들라.”는 가장 현명한 판결을 내리고 어제문(御製文)을 지어 두 묘소 에 제사를 지내도록 특별히 전교를 내리면서 두 집안의 화해를 이끌어 냈다. 이로써 당시의 분수원 산송은 종결되고 양가에서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산송이 종결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두 집안의 묘역에 대한 갈등의 소지는 여전히 되풀이되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소지가 최근 두 종중의 합의에 의해 말끔히 해소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사상인 계세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현실적으로 해결되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었다.
『파주자랑』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