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항한수묘역(柳巷韓脩墓域)은 경기도기념물 제18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서곡리 산87번지이다.
고려시대 문신인 유항 한수(柳巷 韓脩, 1333~1384)의 묘이다. 자는 맹운(孟雲), 호는 유항(柳巷),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밀직부사를 역임한공의(公義)의 아들이다. 충목왕 3년(1347) 어린나이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충정왕 때 정방의 필도지에 임명되었으며, 왕이 손위(遜位)하고 강화로 갈 때 시종하였다. 공민왕 2년(1353) 전의주부로 기용되어 다시 필도지가 되고 이어 전리좌랑, 성균사예, 비서소감, 병부시랑, 국자감좨주 등을 두루 거쳤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때 호종하였으며 귀경 후 사복시판사로 있다가 좌대언으로 승진하였다. 1365년 신돈(辛旽)이 정권을 장악하자 왕에게 “그가 바른 사람이 아니니 멀리할 것”이라고 아뢰었다가 예의판서로 폄직되고 얼마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다시 부름을 받아 이부상서, 수문전학사로 발탁되고, 곧 전선(銓選)을 관장하는 요직인 승선에 임명되었다. 계속해서 우왕대에 우문관대제학, 동지밀직, 상호군 등을 지냈다. 그러나 공민왕 시해에 관련된 한안(韓安)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잠시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378년 배소에서 돌아와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지고 수충찬화공신이 되었다. 이어 청성군(淸城君)에개봉되고 1383년 광정대부 판후덕부사에 이르렀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는 시서(詩書)에도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능하여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있었으며,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 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5호)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 보물 제229호)는 그의 필적이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유항집(柳巷集)』을 남겼다고 한다. 『동문선』에 「영모정행(永慕亭行)」등 시(詩) 여러 수가 수록되어 있다.
묘역은 종중묘역으로 한수의 아버지인 한공의(韓公義, 1307~1365)묘역과 형제인 한리(韓理,1337~1417) 묘역이 인근에 함께 조성되어있다. 그의 묘역은 부인 안동 권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있으며 봉분 앞에 각각 묘비 1기씩을 조성하고 그 아래로 장명등을 각각 1기씩 설치하였다. 장명등 사이로 중앙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그 아래 양쪽으로 문인석 4기와 망주석 2기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봉분은 호석이 없이 원형봉토분인데 고려와 조선전기의 전형적인 양식이었던 호석이 둘려진 방형봉토분이 아니다. 2단의 계체석으로 묘역을 상계·중계·하계로 분리하였다. 좌측 봉분 앞의 묘표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로 비양(碑陽)의 글씨는 판독할 수 없으나 비음(碑陰)에는 공의 5대손 형윤(亨允, 1470~1532)이 중종 때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측 봉분 앞의 묘표는 역시 원수방부의 형태로 비신의 비양(碑陽)에는 1행으로 ‘고려재상한수지묘(高麗宰相韓脩之墓)’라 새겨져 있고, 비음(碑陰)에는 공의 12대손 금천군수(金川郡守) 숙(塾)이 숙종 때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좌측 봉분 앞의 장명등은 옥개석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고 장식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의 것으로 보인다. 우측 봉분 앞의 석재는 위치와 구조상 장명등의 석재로 판단된다. 2쌍의 문인석은 복두공복(幞頭公服)에 홀(忽)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마모가 심하고 고식적(古式的)이어서 조선 전기의 문인석으로 판단된다.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망주석 등은 보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 파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