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김정국묘역(思齋金正國墓域)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3번지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묘이다. 김정국의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팔여거사(八餘居士),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의성으로 우찬성에 증직된 연(璉)의 아들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중종 2년(1507) 생원시와 진사시에 오르고 150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 후 홍문관부수찬, 승문원 교검을 거쳐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513년 홍문관교리, 사간원헌납 1515년 이조정랑, 1516년 의정부검상을 거쳐 의정부사인으로 승진하고 사간원사간, 군기시부정, 성균관사성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18년 직제학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승정원동부승지로 승진하여 왕명을 출납하였다.
1519년 황해도 관찰사로 재임 중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경민편(警民編)》을 편찬하는 등 지방민을 위한 선정을 베풀었으며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향약 장려운동에 호응하여 향약의 보급을 통한 향촌 교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1520년 기묘사화 때 사림파를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형 안국과 함께 관직이 삭탈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그 후, 관직에서 떠난 지 20년 만인 1537년에 관직이 복구돼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전라도관찰사 재임 시 백성들의 병을 보다 쉽게 치유하려고 약방문을 수집하여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을 간행하였다. 또한 수십조에 달하는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다. 1539년 병조참의와 공조참의를 역임하고 가선대부로 승진하여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후에 예조, 병조, 형조참판 등의 요직을 차례로 지내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사재집(思齋集)』을 비롯하여,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典節要)』,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등이 있다. 많은 저서 중 『성리대전서절요(性理大典書節要)(4권)』은 1993년 보물 제 1157호로 지정되었다.
묘역은 부인 경주이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고 묘역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아래 중앙에 장명등을 설치하였다. 묘역 양쪽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세워져 있다. 묘역 아래 입구에는갈(碣) 형태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의 묘비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로 1546년(명종 1)에 건립한 것이다. 비대의 상단에는 연판문의 흔적이 있으며, 전후면은 2구획으로 나누어 안상문을 좌우측면은 1구획으로 안상문을 새겨놓았고, 모서리는 죽절문(竹節紋)이 있다.
장명등은 묘역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고, 옥개석과 몸체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의 화창(火窓) 부분은 없어지고 현재는 새로운 석물로 화창을 임시로 만들어 놓았다. 문인석은 복두공복(幞頭公服)에 홀(笏)을 들고 있는 형상이다.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이고, 비신의 비양(碑陽)과 비음(碑陰)에 기록이 있으며 비양 사단에 전액(篆額)을 ‘문목공신도비명(文穆公神碑銘)’ 이라 횡서로 쓰여 있다. 비문은 박세채(朴世采, 1631~1659)가 찬(撰)한 것을 13대손 준(準, ?~1907)이 글을 써서, 1908년에 재건립한 것이다.
(자료출처 : 파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파주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