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재성현묘역(慵齋成俔墓域)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문현말길 274-18이다.
용재 성현(慵齋 成俔, 1439~1504)은 조선초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자는 경숙(磬叔), 호는 용재(慵齋)·부휴자(浮休子)·허백당(虛白堂)·국오(菊塢)이다. 본관은 창령(昌寧)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염조(念祖)이고 성임(成任)의 아우가 된다. 세조 8년(1462) 23세로 식년문과에, 1466년 27세로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하여 박사로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역임하고 대교(待敎) 등을 거쳐 사록(司錄)에 올랐다.
예종즉위년(1468) 29세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고 예문관수찬·승문원교검을 겸임하였다. 그는 명나라를 자주 다녀왔는데 형 임(任)을 따라 명(明)나라에 가는 도중 기행시를 지어 《관광록(觀光錄)》을 엮었다. 1475년 다시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147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대사간 등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때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488년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 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때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한달만에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그가 음률에 정통하여 장악원제조(掌樂院提調)를 겸하였기 때문에 외직으로 나감으로써 불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 해에 유자광(柳子光)등과 당시의 음악을 집대성하여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였다. 한편,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연산군 즉위 후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가 된 뒤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504년에 《용재총화》를 저술하였다. 죽은 뒤 수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으나 뒤에 신원되었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저서로 《허백당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부휴자담론》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는 문재(文載)이다.
성현 묘역은 정남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봉분은 쌍분으로 부인 한산이씨와 합장묘이다. 특히 이 묘역은 중종 즉위년(1506)에 성현이 신원되어 다시 조성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묘역에는 묘갈 1기, 상석, 향로석, 혼유석 각 1기, 문·무인석 각 1쌍 및 계체석 등이 있다. 봉분은 몇 차례에 걸쳐 개축한 것으로 보이나 문무인석은 원래 그대로이다. 묘갈은 옥개석, 비신, 기대의 형태이며 비신은 오석재를 사용하였고, 옥개석은 화강암재를 사용하였다. 비문은 비신의 4면에 음각하여 새겨져 있다. 묘갈문 중에 ‘공이 죽은지 400여년이 지난 이래’라는 표현으로 보아 1932년에 건립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쌍분의 중앙 앞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는데 상석은 지대석을 받침으로 놓여져 있다.
묘역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각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문인석의 형태는 복두에 공복을 입고 홀을 들고 있는 형태이다. 의습선이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고 눈매가 장승의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무인석은 문인석 앞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무인석은 원정모(圓頂帽)에 갑옷을 입고 칼집을 왼손에 차고 있는 형상이다. 특히 왼손에 잡고 있는 칼집에서 내려오는 매듭과 술까지도 자세히 묘사하고 있어 무인석으로는 걸작품에 속한다. 원정모에서 내려온 띠가 턱선을 따라 묶은 모습, 갑옷의 허리부분에서 묶은 띠와 갑옷에 철징을 박은 모습까지 상세하게 양각으로 묘사되어 있다.
(자료출처 : 파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파주시의 역사와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