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설봉산성(利川 雪峯山城)은 사적 제423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이천시 사음동 산24번지일대이다.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천 시가지의 서쪽과 북쪽을 가로막고 있다. 정상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능선이 이어지는데, 북쪽으로 뻗은 줄기는 이천 시가지를 감싸고 동쪽으로 휘어지고 있다. 남쪽으로 뻗은 능선은 직선에 가깝게 진행하다가 호법 일대의 들판과 만나면서 산줄기가 끝난다. 설봉산성은 설봉산의 정상에 위치하지 않고, 정상부에서 동쪽으로 약 700m 떨어진 해발 246m~322m 봉우리 사이의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1,079m이고, 남북의 길이 380m이고, 동서의 길이 226m인 장방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남서쪽 끝의 장대지(將臺址) 부근이 가장 고도가 높고 여기부터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갈수록 고도가 낮아진다. 장대지 주변에 비교적 넓은 평탄지가 펼쳐져 있고 이곳부터 동쪽과 남쪽으로도 계단식 지형을 이루며 건물터가 연속되어 자리 잡고 있다. 가장 넓은 평탄지는 장대지 동쪽으로 계곡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은 지하수가 솟아 나오는 곳으로 항상 습기가 많아서 건물이 들어서기에 좋은 조건은 아니다. 하지만 우물터가 있고 성 외부에서 완전히 밀폐되어 보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중요 시설이 위치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설봉산성이 위치한 이천은 넓고 비옥한 평야지대이며, 고대 교통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천시가지의 서쪽에 위치한 설봉산의 북쪽은 광주산맥의 여맥인 원적산(630m)·정개산(461m)·양각산(366m) 등이 한 줄로 길게 이어져 있으며, 이천의 북쪽 외곽을 형성하고 있다. 이 산맥에는 일명 ‘넉고개’가 있는데, 곤지암을 거쳐 광주로 연결된다. 설봉산과 넉고개 사이에는 신둔천에 의하여 형성된 침식평야가 있다. 북동쪽으로는 멀리 여주의 파사산성과 남한강이 조망된다. 동쪽으로는 이천 평야 일대와 여주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남쪽으로는 장호원과 망이산성까지 시계에 들어온다. 남쪽은 마옥산(445m)·건지산(411m)·소학산(309m)·대덕산(309m) 등의 잔구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지만, 대부분 평야지대이다. 서쪽으로는 저명산이 솟아있고, 이 산과 설봉산 사이에는 현재 중부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다. 설봉산성은 동쪽·남쪽·북쪽은 잘 조망되지만, 서남쪽은 설봉산 정상부에 막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고자 설봉산의 정상부에는 별도의 부성을 수축하여 용인 방면과 안성 일대의 조망권을 확보했다.
이천은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의 북방진출과 함께 부각된다. 신라는 진흥왕이 한강 하류의 6군을 점령한 553년 이후 554년 관산성 전투의 승리로 적극적으로 한강유역을 영역화해 나가는데 주력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설봉산성이나 설성산성은 기존의 백제가 축조해놓았던 산성을 신라가 거점으로 점유하면서 일련의 성벽과 시설물들을 조성하거나 개·보축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이는 출토되는 유물의 양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신라의 북진은 백제와 고구려에 대항하면서 한강유역을 빼앗기 위해 주요한 교통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천지역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최적의 자연환경과 지리적 요건으로 한강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곳을 장악한 진흥왕은 신라의 최정예부대를 주둔하고 남천정을 만들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였다. 또한 신라가 중국으로 통하는 서해로 진출하는 길목이고 진천이나 안성으로 통해 백제로 진군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설봉산성에 관련된 문헌기록은 조선시대 기록에서부터 등장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설봉산고성(雪峰山古城) 석축으로 둘레가 5,112척인데, 지금은 폐하였다’라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4년(성종 17)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보완한 것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1484년 이전 조선 초기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설봉산성 정상부 주변에도 산성이 2기가 있다. 우선 설봉산 정상부를 둘러싼 테뫼식산성의 부성 1이 있고 이 산성에서 약 80여 m 떨어진 북동쪽 봉우리에 부성 2가 있다. 부성 1은 둘레가 532m이고 동서벽이 긴 장방형의 산성이다. 이곳에는 문터 1개소, 건물터 5개소, 치성 2개소 등이 조사되었다. 부성 2는 둘레가 312m로 평면은 방형에 가깝다. 성내에서는 건물터 2개소, 치성 1개소, 추정 저수조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두 부성의 성벽은 돌을 사용하여 쌓았지만 전체를 축조한 것은 아니다. 절벽이 있어서 성벽을 쌓을 필요가 없는 곳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절벽을 이루는 바위 사이사이 틈새도 돌을 쌓아서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두 산성은 규모가 작고 내부의 공간도 비좁고 식수를 구하기 어렵다는 점 등 산성에서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출토되는 유물도 설봉산성과 큰 차이가 없어서 설봉산성과 축조시기의 차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설봉산성에 부속된 일종의 부성이나 보루로서 기능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설봉산성에서는 서남쪽이 정상부에 가로막혀 잘 보이지 않는데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설봉산성에서부터 이 두 산성까지는 폭 2m 내외의 능선으로 연결되어 능선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통로의 양쪽은 거의 절벽을 이루고 있어서 자연적인 성벽을 이루고 있다.
설봉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조사는 1997년 정밀지표조사가 실시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연차적인 발굴조사계획 및 정비 방안이 수립되었다. 이후 1998년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2005년 6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 결과로 설봉산성의 역사적 성격이 상당부분 규명되었다.
1차 발굴조사에서는 백제토기와 9세기경 신라에 의하여 축조된 유구 및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대지·24기의 토광·저수조·팔각제단지 등의 유구가 조사되었으며, 백제토기와 신라토기, 각종 기와류와 철제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연호인 ‘함통육년(咸通橧年)’이 새겨진 벼루를 비롯하여 중국 해무리굽 백자 등이 출토되어 설봉산성의 성격을 규명하는 근거가 되었다. 함통은 당나라 원종(860~873)의 연호로 신라 경문왕대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설봉산성의 초축에 대해서는 확실 하게 밝혀내지못하였다. 백제토기는 분명하지만 이것과 관련된 백제 유구가 출토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차 발굴조사는 칼바위 주변의 건물터에 대하여 실시되었다. 아울러 서벽 계곡부 성벽에 대한 조사도 같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칼바위 주변에서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제사터가 발굴되었다. 그런데 이 밖에도 삼국시대 제사유적과 토광(저장구덩이)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 일부 저장구덩이에서는 다량의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원래 저장구덩이 속에 있었던 것으로 구덩이가 폐기된 이후 외부에서 쓸려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저장구덩이의 백제토기는 소형 토기도 있지만 주로 대형 항아리 종류로 곡식과 같은 것을 저장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저장구덩이 주변에서는 암반을 원형으로 파내고 기둥을 세웠던 주거지의 흔적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후대에 산성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훼손되어 구체적인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서벽 계곡부 조사에서 백제가 설봉산성을 축조한 흔적이 발굴되었다. 계곡부의 성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문터가 출토되었다. 이후 이것을 서문터로 부르고 있는데 6세기 후반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서문터는 그 이전에 성벽을 허물고 만들었던 것이 밝혀졌다. 서문터 하부를 계속 조사하자 문터가 축조되기 이전의 성벽, 배수구, 집수정 등이 조사되었으며, 여기에서 다양한 종류의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던 토층 위에는 6세기 이후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토층이 있었다. 물론 이 토층은 서문터와 관련된 층이었다. 무엇보다 서문터를 축조하면서 백제 문화층과 백제시대 만들어진 유구들이 완전히 매몰되었다. 특히 배수구나 집수정 안에서는 백제토기만 출토되었다. 서문터를 축조한 이후에는 배수구와 집수정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서문터 하부의 유구는 백제가 축조한 것이 분명해졌다. 저장구덩이에서 출토되는 다량의 백제토기 역시 같은 시기에 것 이다. 서문터와 배수로에서 출토된 신라토기 중에는 6세기 중반이후 신라에서 사용하였던 단각고배편이 있었다. 이 단각고배는 6세기 중반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북진하면서 설봉산성에 진출하였던 사실을 확인되었다.
3차 발굴조사는 현재 복원된 동문터 주변 건물터와 성벽에 대해서 실시되었다. 이곳은 건물터로 추정되었지만 건물의 규모와 형태는 찾기 어려웠다. 많은 기와가 출토되었고 일부 건물의 기초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건물터는 분명하지만 역시 후대에 성벽 보수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라시대에 축조되어 사용되었던 저장시설이 출토되어 신라가 설봉산성을 활용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1차와 2차 발굴조사 결과,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치는 백제토기와 9세기에 해당되는 신라 유물이 많은 양이 출토되었지만, 이에 비하여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이르는 유구 및 유물은 상대적으로 적게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설봉산성의 모습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3차 발굴조사에서는 그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해당하는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공백을 메워주었다.
4차와 5차 발굴조사는 북벽이 지나는 두 계곡 중 남쪽에 위치한 계곡부에 대하여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곳은 설봉산성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지하수 및 빗물이 모여서 산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이 일대는 계곡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장소가 협소하며 다량의 토사가 퇴적되어 있었다. 또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한 차례의 조사만으로는 완료할 수 없어 3년에 걸쳐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계곡부에서는 협축으로 축조된 성벽이 출토되었으며 이 성벽은 최소 3차례의 수·개축 흔적이 확인되었다 능선부에서는 석축으로 조성된 편축 성벽과 토루로 조성된 성벽이 확인되었다. 특히 계곡부에서는 성벽축조 후 내부에 조성된 토축부에서 목재 기둥을 비롯한 부엽층 성벽과 연결된 암거 2기가 출토되었다. 1차 수축은 외벽에서는 성벽을 내어 쌓아 확실히 알 수 있으나 내벽에서는 면석만으로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암거를 기준으로 아래의 토층과 위의 토층이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암거 위의 뻘층에서 출토된 축기목 중 1기가 암거의 측벽석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측벽석으로 사용된 장방형의 석재가 밀려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즉 암거를 훼손하여 축기목을 시설했던 것을 알 수 있었으며, 이 두 유구의 조성시기가 다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벽의 면석도 암거를 기준으로 위·아래가 쌓는 방법이 미세하게 차이가 있음을 확인 하였다. 2차 수축은 외벽에서 확인할 수 없었으나 내벽에서 축조방법을 달리하고 이전의 내벽에서 내어 쌓은 또 다른 면석을 확인하였다. 3차 수축은 이전까지 석축하였던 성벽 상면에 조성 재료를 달리하여 토루를 조성한 흔적을 확인함으로써 알 수 있었다.
설봉산성은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통해 보면,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까지 백제가 산성을 축조하여 활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 축조된 시기는 늦어도 4세기 말을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이며, 출토된 백제토기로 보아 5세기 후반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천지방은 한성백제시대와 고구려 점령기를 거쳐 삼국시대 후반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삼국통일 때 요충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신라의 지방 군사조직인 ‘십정(十停)’ 중 하나인 남천정(南川停)이 설치될 만큼 정치 군사상의 요지였다. 그리고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기를 아우르며 활용된 산성이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2권(증보판)』)
『문화재안내문안집. 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의 성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