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부장군묘(鄭文孚將軍墓)는 경기도기념물 제3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의정부시 산단로132번길 59-17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뛰어난 공적을 세운 농포(農圃) 정문부(1565∼1624) 장군의 묘이다. 정문부는 문무(文武)를 겸한 인물이었다. 선조 18년(1585)에 생원(生員)이 되고 선조 24년(1591)에는 함경북도병마평사(兵馬評事)가 되었다.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관북 일대가 왜군에 의해 함락되고, 회령의 반민(叛民) 국경인(鞠景仁)이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한 대관들을 잡아 왜장 가토[加籐淸正]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격분하여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국세필(鞠世弼)을 참수(斬首)하고, 이어서 명천·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장덕산에서 싸워 대승하였다. 이어 쌍포전투(雙浦戰鬪)와 백탑교전투(白塔郊戰鬪)에서 가토가 이끄는 왜적을 패주케 하여 관북 지방을 완전히 수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큰 공로에도 불구하고 봉작(封爵)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괄(李适 : 1587~1624)의 난(1624)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숙종(肅宗) 때 오명(汚名)을 벗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봉분은 단분이며 부인 고령신씨(高靈申氏)와의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 묘비, 상석, 향로석이 가까이 있고, 그 앞쪽 좌우로 1쌍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동남쪽 50m 지점 낮은 곳에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현종 6년(1665)에 세웠던 것을 철종 12년(1861)에 9대손 정인원(鄭麟元)이 추가로 기록하여 다시 세웠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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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장군의 생애와 북관대첩비에 관하여
정문부의 생애와 활약
156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정문부(鄭文孚)는 7세에 한시를 짓고, 11세 때부터 『논어』를 시작으로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천문(天文)·산수(算數)뿐 아니라 명궁소리를 듣는 활쏘기까지 문무를 겸비한 선비로 성장했다. 14세 때 초시에 합격하고, 21세 되던 해에 생원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23세 때는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닦은 뒤 24세 되던 해인 1588년 대과에 급제하여 정언·지평 등 내직을 역임했다. 1591년, 자청하여 외지인 북관(함경도) 지역 병마평사로 근무하던 중 이듬해 임진왜란이 있어났다. 이 때 조선은 왜군의 침공에 속수무책이어서 열흘 만에 도성을 내주고 임금은 피란길에 올랐으며, 왜군은 함경도 일원까지 진출하였다.
정문부는 북평사로 근무하면서 경성향교에 학당을 열어 인근의 선비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문관 출신으로 무반직 파견이었던 북평사가 맡은 또 다른 소임이기도 했다. 본래 북관지방은 조정에 대한 원성이 크고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던 지역이다. 이런 곳에 의병이 일어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조직하고 수차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문부의 인품과 덕성이 평소 백성들로부터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뢰와 충절로 뭉쳐진 정문부의 북관창의군은 이내 국경인(鞠敬仁) 일당을 참수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어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기세를 몰아 장평전투, 임명전투, 백탑교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쳐 북관지역을 왜군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였는데, 이를 통틀어 북관대첩 이라고 한다.
창의대장 정문부는 함북 길주에서 3천 명 밖에 되지 않는 의병을 이끌고 22,000명에 달하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왜군을 격파하였다. 이처럼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정문부이지만 생전에 전투의 공적은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음해와 시기에 시달려야 했다. 그를 가장 시기하고 음해했던 이는 당시 함경관찰사 윤탁연이었다. 윤탁연은 한창 전쟁 중이었는데도 정문부가 월권하고 수상한 무리들과 담합했다 하여 그를 파직 강등시켜 변방으로 보내는 일종의 유배조치까지 내렸다. 하지만 정문부는 묵묵히 그 직책을 수행했고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곧 창의대장으로 복직되어 다시 큰 전공을 세웠다. 정문부가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우고 그 군세가 커지자 윤탁연은 이를 시기하여 행재소에 그릇 된 보고를 보냄으로써 정문부는 전란극복의 논공행상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의병에 참가한 북관지역 사람 전체에게도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정문부는 전쟁이 끝난 뒤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지 만 빼어난 능력은 버릴 수 없었던지 장례원 판사, 호조참의, 예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고, 1607년(선조 42)부터 다시 외방의 수령으로 나가 장단부사, 남원부사, 길주목사 등 지방 목민관으로서의 직책을 차례로 수행했다.
그 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피난가면서 모친 상중(喪中)인 정문부를 부총관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종기로 운신 이 어려워 사양하고 그 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박홍구 역모옥사에 무고당하여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으나 무죄가 밝혀졌다. 그러나 당시 인조반정공신들이 풀어주지 않고 창원 부사 재직 당시의 초나라 회왕시(懷王詩)를 캐어 계속 문제 삼아 모진 고문 끝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임진왜란에서 위대하고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정문부는 1624년(인조 2) 11월 9일 향년 60세에 사망하였다.
비록 생전에는 전공에 대한 논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향후 정문부의 활약상이 서서히 드러나 숙종 때에 정문부와 북관 의병들의 활동을 상세히 기록한 북관대첩비가 길주에 세워졌다. 정문부가 억울하게 화를 입은 지 41년 만인 1665년(현종 6)에는 영의정 정태화(鄭 太和)의 상소에 의하여 1624년(인조 2)에 있었던 옥중사 때의 억울한 누명이 밝혀지며 신원되었다. 늦게나마 임진왜란 평정의 공으로 선무원종 1등 공신에 봉해지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추증되었다. 1713년(숙종 40)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고 부조전 윤허(1788)를 받았다. 저서로는 『농포집(農圃集)』이 있으며, 보훈처에서는 의병장으로서의 혁혁한 공과 애국충절의 얼을 기리고 이어받고자 2003년 8월의 호국 인물로 선정하였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의 반환
북관대첩비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 지방에 침입한 왜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올린 정문부와 의병들의 공적을 기록한 높이 187㎝, 너비 66㎝, 두께 13㎝의 그리 크지 않은 승전비이다. 비문에는 1592년 정문부가 이끄는 함경도지역 의병이 당시 일본 최고의 명장이라는 가토 기요마사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내용과,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임해군·순화군)를 왜적에게 넘기고 반란을 일으킨 매국노 국세필·국경인 등을 처단한 내용 등이 1,500자 비문에 적혀있다. 이 비(碑)는 숙종 때인 1708년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글을 짓고 이명필(李明弼)이 글을 썼다.
이 비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 2사단 17여단장 이께다 마사스께(池田 正介) 소장이 함경도 길주군 임명역에서 발견하여 미요시 나지유끼 중장이 귀국할 때 전리품으로 일본에 반출, 동경에 있는 야스쿠니신사[靖 國神社]에 방치되어 있었다. 북관대첩비에 관한 이야기는 20세기 초 일본 유학생 조소앙에 의해 발견되어 간간이 화제가 되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었다. 1978년 도쿄에 살고 있던 동포학자 최서면 박사가 다시금 북관대첩비를 밝혀내어 야스쿠니신사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용인 할 수 없다하여 여론화시켰으며, 정문부 등 의병들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일 양국의 인사들이 줄기차게 반환운동을 벌여왔다.
드디어 북관대첩비가 반출된 지 100년 만인 2005년 10월, 한국에 반환되어 몇 달간 국립중앙박물관과 경복궁에 전시하여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 후 원본은 북한의 원래 자리로 전해지고, 복제품 북관대첩비 가 의정부시 용현동 정문부 묘역에 세워졌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