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MEDIA OBJECT
문화유산
지정구분 | 도지정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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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번호 | 경기도기념물 제41호 |
명칭(한자) | 노강서원 (鷺江書院) |
유형 | 유적건조물 |
지정일 | 1977-10-13 |
소재지 |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122번길 153(장암동) |
시대 | 조선시대 |
노강서원(鷺江書院)은 경기도기념물 제4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122번길 153이다.
노강서원(鷺江書院)은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숙종 21년(1695)에 세운 이 서원은 본래는 풍계사였으나,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노강’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당시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매월당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청절사의 터였던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사당(祠堂), 동재(東齋), 서재(西齋), 솟을삼문(三門),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는데,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강당은 따로 두지 않았다. 사당은 박태보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으며, 각 칸에는 4짝으로 이루어진 문을 달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을 사용하였는데 가운데 칸에 용머리를 첨가하였다. 동·서재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원래 이 건물은 온돌방으로 꾸며 유생들이 공부하면서 기거하는 곳이었으나 현재는 향사(享祀)시에 가끔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사당에 배향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는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작은 아버지인 박세후(朴世厚)에게 입양되었다. 24세 때인 1675년(숙종 1) 생원시에 급제하고, 1677년 알성시(謁聖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그 후 1678년 예조좌랑이 되었는 데, 과거시험의 운영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평안도 선천(宣川)으로 귀양갔으나 곧 방면되어 이듬해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여 홍문관에서 상소나 차자(箚刺, 약식 상소문)를 올리게 되면 매번 그가 작성하였다. 박태보는 성품이 결백하여 아부를 하지 않았으므로 시기하는 자도 많았으나, 국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1682년(숙종 8) 국왕의 특별 배려로 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하였다.
그 후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한때 좌천되었다가 1686년 다시 홍문관으로 옮겨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이조좌랑이 되었다. 이때 암행어사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회하며 오래된 온갖 폐단을 시정하고 혁신하니 그곳 백성들이 진정한 어사라고 칭송하였다. 귀경하여 홍문관 응 교로 승진하고 이어서 파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남인들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하려 함에 그 부당함을 주장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그러나 그는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항변하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전라도 진도(珍島)로 귀양 가는 도중 노량진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가 사망한 후 숙종은 곧 후회하였고, 그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처음에는 풍계사(風溪祠)에 배향 되었으나, 1697년(숙종 23)에 노강서원이란 사액을 받았다. 저서로는 문집 『정재집』, 편서 「주서국편」, 글씨 「예조참판박규표비」·「박상충비」 등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도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
노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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