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박세당묘역(西溪朴世堂墓域)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13호로 소새지는 경기도 의정부시 동일로122번길 124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학자인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을 모신 유택이다. 박세당은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 또는 잠계(潛戒)이다. 그는 조선 후기 문신이며 실학의 선구자이다. 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에는 큰 형인 박세규(朴世圭)마저 사망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면서 홀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원주·안동·천안 등지로 떠돌다가 13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한테서 학문의 기초를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게 된 것은 결혼 한 후 가정이 안정된 이후의 일이다.
박세당은 32세 되던 해인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예조좌랑, 춘추관 기사관을 거친 뒤 사간원 정언이 되어서는 공조판서 김좌명, 대사성 이은상을 탄핵하는 등 주관이 분명하고 강직한 관리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일시 다녀왔지만 당쟁을 혐오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 석천동(현 의정부시 장암동)으로 물러났다. 한때 통진현감으로 나가 백성들의 구휼에 힘쓰기도 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두 아들을 잃자 일체의 출사 권유를 물리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몰두하였다. 이와 같은 맑은 기상은 당시 유림과 사대부들 사이에 박세당의 평판을 크게 드높여 문하에 제자들이 몰려들었고, 석천동 일대는 장자(長者)가 사는 곳이라 하여 장자울이라 불리게 되었다. 1703년 중추부판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고 주자학을 비판하는 독자적 견해를 발표하였다. 이에 반주자 (反朱子)로 사문난적(斯文亂賊)의 낙인이 찍혀 삭직당하였으며, 75세의 고령인 관계로 유배를 면하고 집에서 생활하다가 사망하였다. 후에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신원되었다. 박세당은 이중환(李重煥)·안정복 (安鼎福)보다 앞선 시대의 실학파 학자로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룩하였으며, 글씨도 잘 썼다. 『사변록』 외에 『색경(穡經)』, 『서계집』 등의 저서가 있다.
묘역의 봉분은 단분(單墳)으로 두 부인과의 삼위합장묘(三位合葬墓)이다. 원래 묘역의 석물로는 호석, 계체석, 상석, 향로석 뿐이며 묘비, 망주석, 신도비는 최근에 신설·교체한 것이다. 호석은 12개의 장대석을 이용해 봉분을 두르고 있는데, 정방이 691㎝, 좌우측면이 636~639㎝, 용미(龍尾) 부분이 159㎝로 대형의 방형봉토분이다. 계체석을 이용해 묘역을 계절과 배계절로 구분하고 있다. 상석은 뒷면은 계체석을 받침으로 하고 앞면은 2개의 석재를 받침으로 놓여져 있고, 그 앞의 향로석은 사각의 향탁 형태이다. 망주석은 원래의 기단부에 새로운 재질의 화강암으로 기둥을 꽂아 세웠다. 봉분 좌측 약 20m 지점에는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기 위한 상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묘역 우측에 배치되어 있는데 1986년에 건립된 신작(新作)의 비이며, 묘역 하단 50m 지점에 있는 신도비는 1996년에 건립된 신작의 비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문화유적분포지도-의정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