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곡서원(深谷書院)은 사적 제53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심곡로 16-9이다.
학자이며 정치가였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광조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이다.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게 수학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였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시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혁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해 대사헌에 승진되어 신진사류를 정계에 과감히 등용시키고, 이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년)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의 훈공을 대폭 삭제하는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여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이에 훈구파의 김전(金詮, 1458~1523), 남곤(南袞, 1471~1527)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때 일어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선조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1605년(선조 38년)에는 그의 묘소 근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심곡서원은 효종 원년(1649)에 세워 ‘심곡’이라는 현판과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았다. 현종 14년(1673)에는 강당이 중건되었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로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하였다. 그 후, 1974년과 1975년에 각각 중수되었다.
서원은 마을 뒤쪽 야산에 서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 외삼문, 강당인 일소당,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안의 여러 행사와 유림이 모여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로서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하였다. 강당 북동쪽에는 장서각(藏書閣)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 고직사가 있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방화벽을 설치하였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정형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초익공이 결구되고 오량(五樑)의 지붕 가구가 짜올려져 있다. 익공의 형태와 가구 수법으로 볼 때 17세기경의 건물로 추정되나 전면 익공은 20세기에 개변된 듯하다. 강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의 익공계 팔작집인데 사면이 모두 판벽과 판문으로 되어 있고 내부 바닥에도 우물마루가 깔려있다. 기둥에 약한 배흘림이 있으며 익공의 형태도 매우 간결하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이처럼 심곡서원은 강당과 사당만으로 이루어진 조선 후기의 소규모 서원이지만 건물은 상당히 짜임새 있다.
※ 2015년 1월 28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7호에서 사적 제530호로 승격되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용인시 문화재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