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서원(忠烈書院)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충렬로 9-19이다.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성리학의 시조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서원이다. 정몽주는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공양왕 2년(1390)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이성계가 새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을 막으려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나중의 조선 태종)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방원의 회유를 거절한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로도 유명하며, 고려의 3은(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 태종 1년(1401)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았고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충렬서원은 조선 선조 9년(1576)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왜란(1592)으로 불타 없어져 선조 38년(1605)에 다시 지었다. 이때 정몽주 선생의 손자인 설곡(雪谷) 정보(鄭保) 선생과 병자호란(1636~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죽창(竹牕) 이시직(李時稷, 1572~1637) 선생을 같이 모셨다. 광해군 원년(1608)에 임금이 이름을 짓고 현판을 하사하여(사액), 나라의 공인과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담당하였다. 이후 숙종(肅宗) 32년(1706) 현 위치에 다시 이건(移建)되었는데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1년에 유림의 탄원으로 중건되고, 1924년에 복원하였다. 최근에는 1975년과 1979년, 1980년에 중수되었다.
서원은 마을 뒤쪽의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공부하는 강당을 앞쪽에 배치하고 사당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구의 홍살문과 내삼문, 외삼문, 사당이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지만,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재실이나 장경각, 교직사 등 부속건물이 없이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8세기 이후에 서원이 교육적 기능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 중심의 시설로 바뀌어 갔음을 보여 준다. 강당도 교육공간보다는 제향 때 모임 장소로 쓰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집인데 전면에는 개방된 퇴칸이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방화벽(防火壁)이 설치되었다. 내부 중앙에는 벽체를 약간 뒤로 물려 내어 만든 감실(龕室) 안에 포은 선생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운명과 죽창 두 개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구조는 앞쪽에 퇴칸이 있는 칠량(七樑)가구인데 건물 규모에 비하여 복잡한 편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민도리 팔작집으로 서쪽에는 툇마루가 달린 3칸 대청이 있고 동쪽에는 대청보다 약간 높은 누마루가 시설되어 있다. 이 곳에서 보존하는 유물로는 『유한집』과 『단심가』 등이 있다.
단심가(丹心歌) -정몽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번백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용인시 문화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