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선생묘(鄭夢周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이다. 정몽주는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공양왕 2년(1390)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어, 이성계가 새로 나라를 세우려는 것을 막으려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나중의 조선 태종)에 의해 개성의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방원의 회유를 거절한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로도 유명하며, 고려의 3은(三隱-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 태종 1년(1401)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았고 중종 때에는 문묘(文廟)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한 후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후에 고향(경상북도 영일과 영천) 중 한곳인 영천으로 이장할 때, 경기도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자 앞의 명정(銘旌, 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묘소에 떨어져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단분(單墳)으로 묘비, 문인석 1쌍, 상석(床石), 혼유석(魂遊石) 등은 종전의 것이나 장명등, 망주석, 석양(石羊), 곡담, 호석(護石), 난간석 그리고 별도의 새 문인석 1쌍 등은 1970년에 추가설치 하였다. 묘비에는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의 시호를 기록하지 않아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분명히 하였다. 묘역 입구의 신도비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찬(撰)하고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 글을 써서 조선 숙종 22년(1696)에 건립하였다. 비문에는 왕조와 시대를 뛰어넘은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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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유학의 시조 정몽주의 무덤이 용인에 있는 까닭은?
정몽주는 고려시대의 문신이자 학자로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킨 충신이다. 그는 1337년(충숙왕 6) 경상북도 영천에서 정운관(鄭云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이며 호(號)는 포은(圃隱)이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높이 일컬었는데 학문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였다. 또 『대명률(大明律)』을 참작해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정몽주는 위화도회군, 공양왕 옹립 등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였지만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은 함께할 수 없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정몽주를 집으로 초대하여 하여가(何如歌)를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확인하려 하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정몽주는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와 충심을 담은 단심가(丹心歌)55)로 답한다. 결국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선죽교(善竹橋)에서 죽이고 만다. 이때가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던 해이다.
경기도기념물 제1호인 정몽주 묘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慕賢面) 능원리 산3번지에 위치한다. 지금의 모현면은 원래 쇄포촌으로 불렸으나 정몽주를 안장한 후부터 충신을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현(慕賢)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묘현(墓賢)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용인군 지명위원회에서 모현면으로 최종확정하였다. 정몽주의 고향은 영천이고 생전에는 개성에서 살았는데 무덤이 용인에 있는 것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정몽주의 무덤은 원래 해풍군(海豊郡, 지금의 개성시)에 있었는데 후손이 고향인 영천으로 이장하려 하였다. 1406년(태종 6), 영천으로 가던 중 명정(銘旌)이 돌풍에 날아가 떨어졌고 상여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아 명정이 떨어진 곳에 무덤을 썼다고 한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조선 전기 문신인 이석형(李石亨)과 관련이 있는데 명정이 떨어진 곳이 원래 이석형의 묏자리라는 내용이다. 정몽주의 후손이며 이석형의 부인인 연일 정씨가 이곳이 명당이라는 말을 듣고 친정집보다는 시댁이 더 잘되게 하려는 마음에 정몽주 무덤을 명당에 못 쓰게 하려고 밤새 이곳에 물을 길어 부었다. 다음날 정몽주를 이장 하려고 보니 물이 가득 차 있어 할 수 없이 옆 언덕에 무덤을 썼고 훗날 그 자리에 연일 정씨가 남편 이석형을 안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몽주는 1406년에 이장되었고 이석형은 1415년에 태어나 정몽주가 이장될 당시 이석형은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야기는 능원리에 연일 정씨와 연안 이씨 두 일가의 묘역이 함께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전설로 보여진다.
정몽주의 용인 이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학설도 있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과정에서 그 반대 세력으로 제거되었지만 권근(權近)의 건의에 따라 태종은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관직을 증직하는 한편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종의 이러한 조치는 정변을 통하여 집권한 자신의 정권 안정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정몽주의 후손들은 이를 계기로 정몽주의 묘소를 해풍군에서 용인의 쇄포촌으로 이장하였으며 이장 후에는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용인에 정착하게 되었다.
용인으로 이장하게 된 데에는 정몽주의 첫째 아들 정종성(鄭宗誠)의 처가와 관련지을 수 있다. 처가는 박중용(朴仲容)의 집안으로 죽산에서 살던 유력 가문이었다. 죽산은 용인과 인접한 지역으로 이러한 지리적 위치와 당시의 사회 관습인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및 자녀균 분상속을 관련지어 본다면 정몽주 후손들이 용인에서 정착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경제적 기반은 죽산 박씨의 경제적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용인시 문화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