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선생묘(蔡濟恭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7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 산5번지이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인 번암(樊巖) 채제공(1720∼1799) 선생의 묘소이다. 채제공은 15세에 향시(鄕試)로 급제한 뒤 영조 19년(1743) 문과에 급제한 후, 암행어사를 지냈으며 도승지·병조판서·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10여년을 재상으로 있는 동안 여러 분야에 걸쳐 왕을 보필하였다.
영조 24년(1748)에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淸要職)인 예문관사관(藝文館史官)직을 거쳤으며, 영조 29년(1753)에는 충청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균역법(均役法) 실시 과정상의 폐단과 백성들의 의견을 조사하여 올렸다. 그는 영조 34년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 폐위가 논의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가리켜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충신이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는 탕평정치를 표방한 영·정조를 적극 보좌해 당쟁을 억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정조 원년(1777)에 왕을 살해하려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 왕의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수궁대장(守宮大將)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음모를 적발하였고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각 분야에 걸쳐 왕을 충실하게 보필하였다. 정조의 신임을 얻어 이조전랑의 자대제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사노비 폐지에 관한 절목 마련, 천주교에 대한 온건한 정책 유지, 특정 상인의 독점권 철폐를 추진하기도 했다. 말년에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사직하였다. 저서로는 번암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봉분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좌우로 망주석과 석양(石羊)이 1쌍씩 서 있다. 봉분의 오른쪽으로는 묘비가 서있고, 약 80m 떨어진 비각 안에는 정조가 직접 썼다는 뇌문비(誄文碑, 죽은 사람의 생전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을 새긴 비)가 있어 정조의 총애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정조의 총애를 받은 재상이었으면서도 채제공의 묘역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없다. 이는 그가 사망한 뒤 1년 만에 정조가 서거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가 그의 관직을 빼앗았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정순왕후와 제휴한 노론(老論)의 벽파(僻派)가 정권을 잡고, 그의 후손인 남인이 신유사옥(辛酉迫害)으로 정치권에서 배제되는 상황이어서 신도비를 건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순조 23년(1823)에 그의 관직이 복구되면서 문숙(文肅)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 안내문안집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