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선생묘(閔泳煥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8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4번지이다.
1905년 을사조약 강제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1861∼1905)을 모신 묘이다. 민영환은 고종 15년(1878)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판서, 한성부판윤, 주미전권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6년에 특명전권공사(외교관의 하나인 공사의 정식 명칭)로 임명되어 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방문하면서 서양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시정의 개혁을 시도했으며,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였다가 한직인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좌천당했다.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의정대신 조병세 등과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五賊)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국민과 각국 공사 그리고 황제에게 고하는 3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자결하였다. 그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이 남긴 유서 및 그가 사용했던 의복, 인장 등 각종 유품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다.
민영환의 묘소는 용인군 수지면 풍덕천리에 조성되었다가 1942년에 용인군 마북리로 옮겨지면서 부인과 합장했다. 묘소 일대가 재정비된 것은 1959년 3월이었다. 높은 둔덕 위에 담을 설치한 독특한 구조의 묘지로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 좌우로 문인석 한 쌍이 있고 우측으로는 묘비가 서 있다. 봉분 앞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의 친필로 쓰여진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비)가 서 있고, 묘소 입구에는 경기도 공무원들의 기금으로 세원진 신도비가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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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민영환(閔泳煥, 1861∼1905)
민영환은 구한말 외교 분야에서 주목되는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1878년에 18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이후 21세에 동부승지, 27세에 예조판서, 33세에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승진이 이처럼 빨랐던 것은 그가 왕실 외척으로 정국을 주도했던 여흥 민씨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인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는 그의 고모였고 명성황후도 가까운 친척이었다. 민영환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민영환의 중부(仲父)인 민승호가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감으로써 명성황후의 오빠가 되었다.
민영환은 비록 출세가도를 달렸지만 그가 활동한 시기는 대내외적으로 큰 혼란에 휩싸인 시기였다. 내부에서는 임오군란·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외부에서는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임오군란 와중에 민영환의 생부인 민겸호는 피살이 되었다.
민영환은 1895년에 미국공사에 임명되어 외교활동에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는 저항의 표시로 벼슬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민영환이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1896년이었다.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의 자격으로 러시아에 파견되었는데,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행에는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이 있었는데 윤치호는 영어, 김도일은 러시아어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민영환은 1896년 4월 1일에 서울을 출발했고, 인천, 상해, 요코하마, 벤쿠버, 뉴욕, 리버풀, 런던, 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5월 20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지구의 반 바퀴를 도는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민영환의 ‘해천추범(海天秋帆)’은 이때에 목격한 사실을 기록한 여행기이다.
모스크바에서 민영환은 러시아와 외교협상을 벌였다. 당시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한 상황에서 일본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려는 정책을 펴고 있었다. 민영환은 러시아 외상 로마노프와 니콜라이 황제를 만난 자리에서 조선 국왕의 호위를 맡아줄 것, 신식 군대를 조련할 교관과 정책을 자문할 고문을 파견해 줄 것, 청일전쟁으로 인한 배상금을 충당하기 위해 300만 엔의 차관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군사 교관 및 고문을 파견하는 이외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러시아는 일본 정부와 비밀 협상을 진행하면서 자국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영환이 다시 외교활동에 나선 것은 1897년 1월이었다.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영국 여왕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의 외교관을 만났다. 귀국하는 길에는 러시아를 방문하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직접 전달하기도 하였다.
두 차례의 유럽 여행을 통해 민영환은 근대화된 서양 국가들의 번영을 확인하고 이들의 우수한 문물을 수용하고자 하였다. 귀국 후 민영환이 독립협회의 활동을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했던 것도 조국이 처한 현실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뜻대로 진전되지 않았다. 서양 국가와 일본의 역학 관계 속에 대한제국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은 의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관련자를 처벌하고 조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조병세가 구금되자 자신이 주도하여 두 차례 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국운이 기울었음을 깨닫고 자결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그는 세 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황제에게 올리는 글과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글, 서울에 주재하는 외국사절들에게 한국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는 글이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인물지上』
『용인시 문화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