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원선생묘(柳馨遠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3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번지이다.
조선시대 실학자로 근대사회에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 선생의 묘소이다. 광해군 14년(1622)에 서울에서 태어난 선생은 2세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유몽인의 옥(獄)에 연좌되어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옥사하였다. 선생은 5세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7세에는 서경을 읽고 20세에는 문장이 뛰어나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선생은 효종 5년(1654)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다. 효종 4년(1653)에 32살의 젊은 나이로 전라북도 부안에 내려가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학문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그는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기아 구제의 긴급책을 마련하는 등 이웃과 노복(奴僕)에 이르기까지 극진한 사랑을 베풀었다. 농민이 최저 기준량의 경작지를 가지는 토지 개혁을 비롯하여 농병 일치(農兵一致)의 군제 개혁, 부역(賦役)의 균형, 국민 균등의 조세 정리, 국가 재정의 확립, 농업을 위주로 한 상공업의 장려,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의 실시, 관아의 정비 등을 주장하여 이상 국가(理想國家) 건설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그가 10년 동안 저작한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에는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자영농민을 육성해야 한다고 했다. 이 밖에 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선생은 실학을 학문의 위치로 자리잡게 하였으며 평생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며 실학의 선구자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봉분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묘비, 전방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그 앞쪽 좌우에는 문인석 1쌍이 배열되어 있다. 봉분 주위로는 1971년에 신설한 곡담이 반원형으로 둘러져 있다. 이 묘역의 후방에는 부친인 유흠(柳欽)과 어머니 이씨를 합장한 묘역이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1』
『용인시 문화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