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處仁城)은 경기도기념물 제4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43번지이다.
경기도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에 있는 산성으로, 흙으로 성벽을 쌓아 올렸다. 이곳은 고려 때 처인부곡으로 불렸던 곳으로,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 때 고려의 승장 김윤후 장군이 살리타이 장군을 사살한 격전지이기도 하다. 이 성을 중심으로 저항한 고려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승군(僧軍)과 같은 의병(義兵)이나 민병(民兵)일 가능성이 많으며 성이 있던 처인부곡(處仁部曲) 사람들의 대몽 항쟁 의식과 전승지로 중요하다.
처인성은 야산의 끝자락인 구릉 위에 쌓은 평지성으로 오랜 세월동안 풍우에 훼손되어 동·서·남쪽에만 성터가 남아 있었다. 주변보다 높은 지형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평면은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성을 쌓은 방법을 보면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다졌다. 지형의 높이를 고려하였기 때문에 성벽의 높이는 4.8∼6.3m로 차이가 난다. 성 안은 뒤쪽이 높게 턱이 지고 앞쪽은 얕고 깊으며, 들판 가운데 누에고치 모양으로 있어, 숨거나 기습할 수 있는 훌륭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성은 본래 고려 때에 군창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며, 백제 때에 쌓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발굴 조사 결과 성내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어 이 성이 처음 쌓아진 시기가 통일신라 시대로 소급될 가능성이 크다. 처인성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육로의 요충지인 처인성에 주둔한 왜병을 수원의 독산성에 집결한 관군의 대부대가 무찔러 처인성을 탈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처인성은 1970년대 후반에 일부 복원하였는데, 1977년 남서쪽 성곽 120m를 쌓았으며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실시된 공사에서는 동남북 방면의 성벽 205m를 쌓았다. 1979년에는 처인성대첩 기념비가 준공되었다. 또한 이 성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말안장같은 야산이 있는데, 여기서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사장(死將)터’ 또는 ‘살장(殺將)터’라고 부른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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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고려 때 몽골의 침입을 막아낸 처인성전투에 관하여
1232년(고종 19)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하였을 때 수주(水州, 지금의 수원과 그 부근)에 소속된 처인부곡(處仁部曲)에서 승려 김윤후(金允侯)가 처인부곡민과 함께 몽골 장군 살리타이(철례탑, 撤禮塔)를 죽이고 몽골군을 물리친 것이 처인성전투이다.
1231년부터 몽골의 침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1차 침입 이후 1232년에는 당시 고려의 집권자 최우가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몽골은 고려의 강화도 천도를 적대적 조치로 판단하였고 고려의 의중을 떠보는 편지를 보내어 더 많은 공물을 보내고 군사적으로 협조 할 것 등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2차로 고려를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지금의 북한산성)을 함락하고 광주로 쳐들어갔다. 1232년 11월, 광주성 (지금의 남한산성)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몽골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고 광주성 공략에 실패한 몽골군은 계속 남진하여 처인성에 이르게 된다.
1232년 12월 16일, 당시 처인성에는 사람들이 피해 있었고 그 가운데 김윤후도 있었다. 김윤후는 주민을 이끌고 몽골군에 맞서 싸우다가 몽골군 장수 살리타이를 화살로 쏘아죽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런데 현재 처인성의 모습을 보면 성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전 투를 벌였다든지 성 안에 몸을 숨기고 장시간 버티며 적을 상대했다고 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처인성은 해발 고도가 70.9m인 낮은 구릉의 경사면을 최대한 이용하여 흙으로 성벽을 쌓은 작은 규모의 토루(土壘)이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둘레가 3리 (1,178m)나 된다고 하였으나 현재 남은 성의 둘레는 약 350m이다. 이러한 상황이므로 김윤후와 주민들이 성문을 걸어 잠근 상황에서 몽골군이 성을 에워싸고 전투를 했다고 상상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여기서 처인성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사(高麗史)』에는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승려 한 사람이 병란을 피하여 성 안에 있다가 화살을 쏘아 살리타이를 죽였다. 동진국에 대답하는 글에 말하기를 (…) 금년 12월 16일에 이르러 수주에 속한 고을인 처인부곡의 작은 성에서 바야흐로 적과 싸우려고 마주하여 화살을 쏘아 적군의 괴수 살리타이를 명중시켜 그를 죽이고, 포로로 잡은 것도 역시 많았으며, 나머지 무리들은 무너져 흩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원사(元史)』에는 ‘살리타이가 고려의 처인성을 공격하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별장 철가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라고 되어있다. 이 기록들에서 주목할 부분은 ‘작은 성’과 ‘흐르는 화살’이다. 작은 성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처인성을 작은 성이 라고 칭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또 흐르는 화살이라고 하면 정확하게 활을 겨냥해서 쏘았다기보다는 혼란스러운 전투 속에서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날아든 화살에 맞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기록 하나를 더 보 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승려 하나가 병란을 피하여 성 안에 있었다가 활로 쏘아 살리타이를 죽였다. 나라에서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의 벼슬을 주니 승려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사양하여 말하기를 ‘싸울 때에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는데 어찌 감히 헛되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섭랑장의 벼슬을 주었는데 그 승려는 바로 김윤후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김윤후는 활을 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어 흐르는 화살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가 더 어렵다.
처인성 전투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작은 토루에 몸을 숨기고 있던 김윤후와 처인부곡민이 목숨을 지키고자 몽골군에 대항한, 즉 지역민의 자력적 항쟁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살리타이는 누군가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고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포로로 잡히거나 철수하였다. 처인성에서 동북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구릉이 살리타이가 화살을 맞아 죽은 사장(死將, 射場)터로 전해지고 있다.
처인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로는 1998년 지표조사와 1999년 시굴 조사가 있었고, 이를 통하여 처인성의 성격 규명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당초문 암막새가 출토되어 축성시기가 통일신라시대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성에서는 통일신라시대∼고려시 대의 다양한 유물이 나왔는데, 특히 철제대도(鐵製大刀), 철모(鐵矛), 화살촉 등은 처인성전투와 관련된 유물로 생각될 수도 있다. 1979년∼1980년에 성벽 복원과 수축공사가 있었는데 당시 자문을 맡은 고(故) 이선근 박사는 토층 단면과 채집 토기를 통하여 성의 축성 시기를 백제 시대로 보았다고 전해지는데, 정밀 발굴조사를 실시한다면 성의 초축시기를 비롯한 성의 성격이 보다 명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
『용인의 옛성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