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겸선생묘(吳允謙先生墓)는 경기도기념물 제104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로61번길 29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추탄 오윤겸(1559∼1636) 선생의 묘이다. 선조 15년(1582)에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철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다. 광해군 9년(1617)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는데, 이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정상화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 1565~1640)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상용(金尙容, 1561~1637)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위하였고, 이어 우의정·좌우정을 거쳐 인조 6년(1628)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때 여러 정치 분쟁을 중재하였으며, 정치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부인 경주 이씨와의 합장묘로 봉분은 2개이고, 묘역은 후손들이 1986년에 새로 단장하면서 봉분 아랫부분에 원형으로 둘레석을 둘렀다. 2개의 묘 사이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왼쪽 묘의 앞에 묘비가 있는데, 비의 규모는 총 높이가 282㎝로 비교적 대형이며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쓴 것으로, 인조 25년(1647)에 세운 것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문화재 안내문안집. 1』
『용인시 문화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