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조광조묘및신도비(文貞公趙光祖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16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포은대로 125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정암(靜庵) 조광조(1482∼1519) 선생의 묘소이다. 조광조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菴)이다. 김굉필(金宏弼, 1454~1504)에게 수학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金宗直 : 1431~1492)의 학통을 이은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이때부터 중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역설하였으며,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였다. 1518년 부제학이 되어서는 유학의 이상정치를 구현하기 위하여 미신타파를 내세워 소격서(昭格署)의 폐시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혁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해 대사헌에 승진되어 신진사류를 정계에 과감히 등용시키고, 이들과 함께 훈구세력의 타도와 구제(舊制)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나섰다. 그리하여 1519년(중종 14년)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의 훈공을 대폭 삭제하는 등 급진적 개혁을 단행하여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 시켰다.
이에 훈구파의 김전(金詮, 1458~1523), 남곤(南袞, 1471~1527) 등의 정치적 반격이라 할 수 있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이 때 일어난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선조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으로 높임을 받고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1605년(선조 38년)에는 그의 묘소 근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에 봉안되는 등 전국에 많은 향사가 세워졌다. 문집으로는 『정암집(靜庵集)』이 있다.
조광조 묘역의 봉분은 단분으로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이씨와의 합장묘이다. 석물로는 묘비 1기, 혼유석 1기, 상석 1기,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 및 계체석(階砌石) 등이 있다. 그리고 묘역의 전방 50m 아래에는 신도비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 앞의 묘비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를 지녔다. 비신의 비음(碑陰)에는 이산해(李山海, 1539~1609)가 글을 지은 것은 판독할 수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건립연대는 판독할 수 없다.
그러나 비교적 그 형태에 있어서 신도비와 차이가 없고 이산해가 같이 관여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묘비의 건립연대를 신도비의 건립연대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신도비는 묘비와 같은 형태이고 비문은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이 찬(撰)하고, 이산해가 글을 썼으며, 김응남(金應南, 1546~1598)이 전액(篆額)을 하여, 1585년(선조 18년)에 건립한 것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용인시 문화재 총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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