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헌이석형묘및신도비(樗軒李石亨墓및神道碑)는 경기도기념물 제17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 45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 선생의 묘소이다. 이석형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이다. 세종 23년(1441)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14년간 집현전에서 여러 관직을 맡았다. 세조 2년(1456) 사육신 사건을 전해 듣고 그들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동헌에 남겼는데, 다른 관리들이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으나 세조가 막아주었다. 그 후에도 세조의 총애를 받아 황해도 관찰사·사헌부 대사헌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성종대에는 손성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다. 저서로는『대학연의』, 『대학연의집략』, 『저헌집』 등이 있다.
그의 묘역은 정몽주 묘역이 있는 좌측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단분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와의 합장묘이다. 원래의 석물로는 봉분 우측의 묘비와 묘역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문인석 2쌍이 있다. 봉분 앞의 상석, 향로석, 계체석 등은 새로이 교체되었다. 묘역의 50m 전방에는 신도비가 위치하고 있다.
묘비는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이다. 비음(碑陰)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 공이 몰하였을 때 짧은 표석(短表)이 있어 다만 성명과 졸(卒)과 장(葬)을 기록하였을 뿐이며, 또 글씨가 흐려서 읽을 수 없었다. 이제 삼가 통문(通文)으로 여러 종족과 의논하여 다른 돌을 고쳐 세우기로 하고 이어 감히 공의 사적(事績)의 본말(本末)을 위와 같이 간략하게 쓴다. 그 세계(世系)와 이력의 상세한 것은 대비(大碑, 신도비) 안에 갖추어 실었으니 여기서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밝혀 놓았다. 그리고 ‘칠대손 통훈대부행청풍도호부사 희조근찬(七代孫通訓大夫行淸風都護府使喜朝謹撰)’ 으로 끝을 맺고 있어 이희조(李喜朝, 1655~1724)의 활동시기인 17세기말부터 18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인석은 2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전기의 양식인 복두공복(幞頭公服)에 홀(笏)을 들고 있는 양식이다. 묘비의 기록에 의하면 ‘부인 정씨가 공보다 먼저 졸하여 이곳에 장사지냈는데 이에 이르러 무덤을 같이 하였다’고 밝히고 있어, 부인의 무덤에 있었던 문인석에 합장을 하게 되면서 또다시 1쌍의 문인석을 추가로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도비는 역시 원수방부(圓首方趺)의 형태이다. 비문은 4대손 이정구(李廷龜, 1564~1635)가 찬(撰)하고,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글을 쓰고,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전액(篆額)을 하여 1624년(인조 2년)에 건립된 것이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2』)
『용인시 문화재 총람』
『용인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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