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덕사석조여래입상(龍德寺石造如來立像)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1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목리 55번지이다.
용덕사(龍德寺)는 1792년 석담(石潭)이 쓴 『용인군성륜산굴암용덕암창건기(龍仁郡聖輪山窟庵龍德庵創建記)』와 1914년 이경순(李京淳) 주지가 작성한 『불양전답헌납기(佛養田沓獻納記)』에 들어 있는 『용덕사중수기(龍德寺重修記)』를 통하여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이 창건한 후,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와 1792년 석담비구 등이 여러 차례 중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용주사본말사기(龍珠寺本末寺記)』에서 ‘용덕사는 도선 이후 천 년간 폐사되었다가 근래에 중창되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조선후기 본격적인 중창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불상은 이동면 천리 적동저수지 입구에 저수지 하단 제방 좌안 1/3의 지점에 있었던 것으로 1960년대 초 저수지 축조 공사를 시작하면서 저수지 입구 좌측으로 옮겨 정측 1칸의 당우(堂宇)에 안치 했었다. 후에 1㎞ 정도 떨어진 용덕사로 이전되면서 ‘천리석조여래입상(泉里石造如來立像)’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석불은 전체 높이가 207㎝의 불상으로 잘 다듬어진 화강암 1석으로 사용하여 조각하였지만, 배 부분에 상반신과 하반신을 붙인 흔적이 남아있어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살펴보면 머리에는 육계의 흔적이 있고 계란형의 둥근 얼굴에는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하지만, 최근 석불에 덧칠해져 있던 시멘트를 제거하면서 코, 턱, 삼도(三道)를 너무 깊이 파내어 원형을 훼손하였다. 법의는 대의(大衣)가 양어깨를 완전히 덮은 통견이며 양쪽 팔에서 흘러내린 천의는 발끝에 닿았다. 가슴 앞에서 원호로 나타나는 의문(衣文)이 길게 처지면서 하반신에서 양 다리에서 타원형의 주름을 만들면서 흐른다. 도식화된 이러한 형태의 옷주름 표현은 8세기 이후의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신체에 비하여 손은 약간 큰 편으로 시무외(施無畏), 여원(與願)을 취한 것으로 보이나 오른손은 어깨까지 올려 꽃잎이 표현된 앙연(仰蓮)봉우리를 쥐고 있다. 용덕사 석조여래좌상은 경기도의 이천과 여주 등지에 남아있는 지방양식을 반영한 작품으로 수인과 옷주름 등으로 볼 때 전체적으로 옷주름이 패턴화된 경향을 일부 보이고 신체는 부피감 없이 다소 경직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계승하면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용인시 문화재 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