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정최유경묘역(竹亭崔有慶墓域)은 경기도문화재자료 제12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고매로131번길 17-7이다.
고려와 조선의 문신으로 조선 개국공신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최유경(崔有慶, 1343~1413)의 묘역이다. 최유경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지(慶之), 호는 죽정(竹亭)이다. 고려 공민왕 21년(1372) 판도좌랑(判圖佐郞)이 되었다. 사헌장령(司憲掌令)으로 있을 때 윤충좌(尹忠佐)의 교만 방자함을 탄핵했다. 이어 여러 벼슬을 지내며 공을 세웠다. 특히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이 되었다. 태조 6년(1397)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서 경기·충청 도체찰사(都體察使), 이듬해 개성유후(開城留侯)로서 경기우도(京畿右道)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그는 한양성을 축성한 인물로서 태조 7년(1398) 한양성 축성 및 남대문 축조를 감역(監役)했다는 상량문이 최근에 발견된 바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태종 1년(1401)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 왔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로 있다가 사임했다. 태종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祿選)되었다. 청주의 송천서원(松泉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그의 묘는 조선 초기의 형식인 방형쌍분묘(方形雙墳墓)로 원래는 고성현부인(固城縣夫人)과의 합장묘이다. 최유경의 전체 묘역은 일반적인 묘역과는 다르게 계체석(階砌石)을 3단으로 조성하여 상계(上階)·중계(中階)·하계(下階)로 구분하고 있다. 상계에는 각각 호석이 둘러진 쌍분과, 그 앞에 세워진 묘비가 위치한다. 각각의 묘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을 설치하여 놓았다. 중계의 중앙에는 장명등을 설치하고 문인석을 좌우에 배치하였다. 하계에는 문인석이 좌우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의 기단부에는 호석이 방형으로 둘러져 있으며, 각각의 봉분 앞에 원수방부(圓首方趺) 형식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장방형 지대석 위에 옥개석(屋蓋石)을 갖추었으며, 비신의 석질은 대리석이다. 묘비의 비음(碑陰) 기록에 의하면 1674(현종 15년)에 9대손 최후량(崔後亮)이 쓴 것이다. 이 기록으로 최유경의 묘비가 1674년에 개비된 것을 알 수 있다. 고성이씨의 묘비가 형태상 최유경 묘비보다 더 고식(古式)적인 형태를 보인다. 다만 비문의 판독이 어려워 정확한 연대의 추정이 어렵다.
중계에 위치한 장명등은 화창이 전면과 좌우측면이 막히고 후면에 화창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중계에 위치한 문인석은 복두를 쓰고 있지만 전형적인 공복의 형식이 아니고, 허리를 두른 띠 등의 복식표현, 1m 정도의 작은 크기 등 전체적으로 고식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하계에 세워진 문인석은 복두(幞頭)에 공복(公服)을 입은 형식이나 아직 눈의 표현이 장승적 요소를 가지고 있음으로써 중계의 문인석보다 다소 시기적으로는 늦지만 조선 전기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변계량(卞季良)이 지어서 1413년에 세웠다는 묘갈은 없고, 현재는 최근에 새로 조성된 비가 상계(上階)의 좌측에 세워져 있다.
하단에는 그의 아들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지낸 사강(士康) 부부의 묘가 있다. 쌍분임에도 장면 등을 묘 앞에 각각 1개씩 세운 것이 특징이다. 최유경의 8대손으로 인조때 용인현령을 지낸 최노첨의 묘는 방형 지대석이 생략된 원형 봉토분으로서 묘지 기단석이 생략되었고, 상석 하단에 앙련(仰蓮)의 연화문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묘역 입구에는 영덕재(永德齋)가 건립되어 있고, 그 우측에는 1950년대에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용인시 문화재 총람』
『경기 묘제 석조 미술上,下-조선전기해설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