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는 보물 제23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이다.
신륵사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는 현재 명부전이 있다. 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원래 이곳에는 대장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바로 신륵사에 있었다는 대장각의 조성배경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이다. 원래는 대장각이 있는 서쪽 언덕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언제인가 극락보전 동쪽 언덕, 전탑 북쪽으로 옮겨온 듯하다.
신륵사에 대장각을 세우려고 발원한 인물은 이곡이다. 이곡의 호는 가정으로 목은 이색의 아버지이다. 이색은 애초에는 불교를 탄핵한 이름난 성리학자였다. 이색이 불교를 가까이 하게 된 것은 바로 그의 아버지 이곡이 신륵사에 대장경을 간행하여 보시하려던 약속을 대신 이행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이색은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1381년 4월 연출을 시작해 12월에 끝내고 대장각에 안치하여 공민왕의 자복(資福)과 선고·선비의 명복을 빌었다. 이 불사에는 무학, 최영, 최무선, 권중화 등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동참하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태고보우 및 나옹선사와도 친교를 맺게 되었고, 나옹스님이 입적한 후 회암사에 있는 나옹선사의 탑비 선각왕사비 비문을 쓰기도 하였다. 이 비석의 비문은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해서로 썼다.
이 비는 보제존자석종비와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른 맛을 주고 있다. 직사각형 지대석 위에 역시 직사각형의 대석을 놓고 그 위에 비좌를 올려놓았다. 비좌 상면에 장방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꽂고 그 위에 다시 지붕돌을 얹었다. 귀부와 이수를 대석과 지붕돌로 바꾸어 전체적으로 간략화 된 양식을 취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은 없지만 나름대로 생략과 간소화된 양식이 오히려 투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 이 같은 양식은 고려 말에 보이는 새로운 형식으로 뒤에 조선시대 석비 양식에 영향을 준다.
비신은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으며 비신이 쪼개지는 것을 방지하게 위하여 양측면에 화강암으로 만든 지주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비신은 손상이 커 잘려나가거나 탈락된 부분이 많다. 대리석이 화강암에 비하여 석질이 약하기 때문에 양측면에 지주를 세워도 비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어렵다.
따라서 비문 내용을 모두 파악하기 어렵다. 건립연대로 탈락되어 정확한 건립시기를 알 수 없다.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남녀 신도)를 구분하여 그 이름을 밝히고 있다. 이색과 나옹선사 문하생들이 발원하여 우왕 6년(1380) 2월부터 대장각을 지었으며, 경률론(經律論) 3장을 인출하고 수장했었다고 한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여주군 문화유적 지도-지정문화재편』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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