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사(江漢祠)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0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청심로 113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우암 송시열의 뜻을 기리고 제사지내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우암 송시열은 인조 11년(163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후일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효종 9년(1658) 이조판서에 승진되어 북벌계획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의정을 거쳐 현종 13년(1672) 좌의정이 되었다. 현종 15년(1674)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문제로 일시 유배되었다가 남인이 실각하자 영중추부사로 기용되었으며 숙종 9년(1683)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노론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였으며, 숙종 15년(1689) 왕세자(경종) 책봉 문제로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 도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일생을 주자학(朱子學) 연구에 몰두한 거유(巨儒)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예론에 밝았으며 뛰어난 학식을 지녔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시호는 문정(文正)으로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에 배향(配享)되었다.
정조 9년(1785)에 왕이 김양행에게 사당을 짓게 하고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大老)’의 명칭을 붙여 사당 이름을 대로사라고 하였다. 그 뒤 고종 10년(1873) 10월에 강한사라 개칭하였다.
건물은 강당과 사묘, 관리인이 거주하는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비교적 간단한 규모이나 배치가 특이하다. 주축상에는 사당과 내·외삼문(內·外三門)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은 주축에 직교되게 위치하고 있다. 비각(碑閣)은 외삼문 밖에 있는데 담장이 둘러져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출입문인 장인문이 서쪽으로 나있으며 사묘 또한 서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영릉(효종의 릉)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翼工系) 맞배집인데 전면에는 개방된 퇴칸이 있고 측면과 후면에는 방화벽이 설치되어 있다. 장대석 기단에 놓인 정형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이 세워져 초익공이 결구되고 오량(五樑)의 지붕 가구가 짜올려져 있다. 내부에는 위패와 영정이 봉안된 감실(龕室)이 있다. 부재 형태와 가구 수법은 18세기 익공 형식의 기준이 될 만큼 완벽하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민도리 팔작집인데 4칸 대청과 2칸 온돌방 주변에 툇마루가 있다. 비각은 사방이 1칸인 익공계 팔작집인데 지붕 가구에서는 사모정자의 수법이 사용되었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을 철거할 때 송시열을 모시던 44개의 서원이 모두 헐렸으나 오직 대로사만이 강한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남게 되었다. 강한사는 배치도 특이하고 건물의 질도 우수하여 경기 지역의 사묘(祠廟)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여주시청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지도로 보는) 아름다운 경기건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