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고달사지(驪州 高達寺址)는 사적 제382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번지이다.
여주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불교유적이 널리 분포하고 있다. 그 가운데 고달사지는 서·남·북 3면이 낮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으며, 사지(寺址)를 둘러싸고 흘러내려오는 두 개의 작은 냇물이 우두산에서 발원하여 남한강으로 빠져나가는 입지에 위치하여 일조와 배수가 잘되고 자연지형에 순응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고달사지는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보면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원감대사가 혜목산에 들어와 머물 당시의 정황이 양양 선림원지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禪林院址弘覺禪師塔碑)(886)에 나와 있으며, 이후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975)와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1132)에서도 고달사지 번영기의 모습은 물론 점차 사세가 축소되어가는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그 후 절이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척약재집』에는 그가 여강의 누위에서 고달사의 진상인에게 보내는 시가 실려 있고, 한수(韓修 : 1333~1384)의 『유항시집(柳巷詩集)』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달 옛 정사에 들러 정취를 느끼며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다.
원천석(元天錫, 1333~1384)의 『운곡행록(耘谷檧槣)』에는 고달사의 천태노인 2대 선사 의징에게 보내는 시가 담겨 있어 최소한 14세기까지는 사찰이 경영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16세기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달사가 취암사·상원사와 함께 혜목산에 있다는 기록이 있고, 이식(橷植, 1584~1647)의 「천장잡록(遷葬雜槣)」에 고달원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주읍지(1699)』, 『여지도서(1757~1765)』, 『경기지(1842~1843)』, 『경기읍지(1871)』에는 ‘북면(樁面) ○삼십리고달동(○三十里高達洞)’이라는 기록만이 보이고, 이들 지리지에 실린 지도와 『청구도(1834)』, 『해동지도(1760)』에는 신륵사만 표시되어 있을 뿐, 고달사는 표시되어 있지 않고 고달산만 그려져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16세기를 전후해서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밖에 『범우고(梵宇攷)』에 보면 비로소 여주 고달사가 폐사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 살펴본 사료와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볼 때, 고달사지는 통일신라 말 이래로 개산조(開山祖)인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8~869) 이래 문조(門祖)인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璨幽, 869~958)가 주석하면서 봉림(鳳林) (혜목, 慧目)산문(山門)의 법맥을 이어오면서 선종사원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으며, 고려 광종대에 부동사원(樂動寺院)으로 정해지고 법안종계(法眼宗係) 사원으로 유지되어 오다가,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회합된 5대 사원 안에 포함될 정도로 고려시대 대표적인 선종사원으로 자리매김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의천 입적 후 학승들이 다시 본산사로 돌아와 크게 중창하였으며, 이후 16세기 말까지 경영되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찰이 폐사된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역 내에 여타 건물과 민가가 들어서 마을을 형성하고 일부는 경작지로 변모됨에 따라 사지가 파괴되어 왔다. 이에 경기도와 여주군은 사역의 정비와 보존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시굴 및 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1998년 이래로 6차에 걸쳐 이루어진 고달사지 발굴조사는 이러한 역사를 뒷받침 해주듯 고려 전기의 유구와 유물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시간적 변화과정을 그대로 담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 유구는 통일신라 말 이래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중창과 개수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어왔는데, 크게 4단계(1~6기)로 나눌 수 있다. 고달사 초창기인 1~2기 가람(8세기~10세기 중엽), 사세가 번창한 3기 가람(10세기 중엽~11세기), 천태종 회합 후 산문으로 돌아와 다시 중창을 이룬 4~5기 가람(12~13세기), 조선시대 폐사 전까지 경영된 6기 가람(14~16세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사된 유적은 지형을 따라 크게 3단의 축대 위에 3구역(가·나·다 구역)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이들은 존속시기가 각기 다른 나말여초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구들로 법당지와 불전지·승방지·욕실·요사채 등을 비롯한 건물터 28동·담장지 4기·고달사지쌍사자석등지 1기·탑지 2기·축대 9기 등이 발굴되었다. 각각의 구역은 다시 여러 개의 원(院)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사이의 축조 시기나 계획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곧 이들은 석조물과 짝을 이루는 몇 개의 주요 전각이 여러 개의 축과 원을 이루면서 영역을 구성하고 전체적인 질서를 갖추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1~2차 발굴조사구역인 나구역에서 고려 초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대좌(佛臺座)가 안치된 나-1건물터를 중심으로 그 남쪽과 북쪽에 각각 1기의 탑지가 발굴되었고, 주변으로 건물터를 덧붙여 나가거나 새로운 건물터가 축조되는 등 변화를 겪으며 중심영역 및 좌향이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나-3건물터 내부에는 우물이, 나-5건물터 내부에는 방형으로 구획된 부석시설이 남아 있어 의례 및 제례와 관련된 행위가 이루어진 건물터로 추정되어 주목받았다. 이와 더불어 조사가 진행된 다 구역에서는 원종대사혜진탑비를 중심으로 그 북쪽에는 동향한 3동의 건물터가 중복되어 있고, 남쪽에는 남향한 건물터가 위치해 있다. 이들은 사역의 서쪽 끝에 위치하며, 일부 건물터는 주좌와 고막이좌가 잘 표현되어 있거나 주변 건물터의 기단석과 동일한 석재로 기단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원종대사혜진탑비와 성격 및 조성 시기 면에서 상당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6차 발굴조사구역인 가 구역은 가-1축대 아래로 예불 및 수행공간으로 추정되는 3동의 건물터가 쌍사자석등이 놓인 마당을 향해 배치되어 원을 이루고 있고, 그 남쪽으로는 시내 가까이에 생활공간으로 추정되는 여러 동의 건물터들이 중첩되어 위치해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구들과 마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터도 발굴되었다.
또한 가-1건물터 동쪽에는 가-12건물터를 비롯한 6동의 건물터가 발굴되어 사역이 동쪽으로 계속 연장되었으며, 몇몇 건물터 및 쌍사자석등지, 탑지의 하부를 조사하여 그 축조기법 및 축조시기를 추정하였다. 또한 4차 및 6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이보다 앞서는 나말여초시대 건물터와 유구들도 일부 확인됨에 따라 고달사지의 초창시기와 연관하여 살펴볼 자료가 조사되었다.
출토된 와전류로는 연화문·귀목문 수막새와 당초문·인동당초문·초엽문암막새·귀면와, 그리고 ‘고달사(高達寺)’와 ‘일불절절(一不絶絶) 정이전숭복선(正而傳嵩福禪) 진공○선사(眞空○禪師)’이 새겨진 여러 점의 명문와, 평기와, 전 등이 있다. 또한 생활용기 및 매납도기로 사용된 반구병, 대옹, 도기호, 동이, 도기병, 매병편 등 다양한 기종의 도기가 출토되었다.
이 밖에도 청자선해무리완과 외벽을 세로로 길게 눌러 요철을 나타낸 고려백자화형접시 등도 소량 출토되었으며, 청자음각국화문화형잔탁을 비롯한 자기·중국자기·청동향로·청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 조사된 사역은 2006~2009년에 걸쳐 복토 및 축대정비, 주변정비 등이 이루어져 있다. 이 밖에도 사지 내에는 여주고달사지승탑(국보 제4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및 이수(보물 제6호),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보물 제7호), 여주 고달사지 석조대좌(보물 제8호),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제282호, 국립중앙박물관), 이름 없는 귀부 등이 남아 있어 미술사·고고학·건축사 등 다양한 분야에 중요한 연구 자료를 제공해 준다.
또한 2기의 석조와 탑부재·건축부재 등의 석제편이 발견되어 당시 조각술과 건축술을 짐작하게 해준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 사적 제1권(증보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 현황』
『건축유적 발굴조사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