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사적 제195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 269-50이다.
영릉(英陵)은 조선 4대 세종(재위 1418∼1450)과 부인 소헌왕후 심씨(1395∼1446)의 무덤이다. 세종은 정치·경제·사회·역사·문화 등 각 분야에서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왕이다.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영릉의 지세는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층층이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국이라 한다. 거기에다 정남향 이어서 ‘가히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인데, 이를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이라한다.
영릉의 정문으로 들어서면 재실과 세종대왕 동상이 오른쪽에 서 있고, 왼쪽에는 세종대왕기념관인 세종전이 있으며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성역화사업으로 주변정비를 실시하였다. 훈민문을 지나 너른 능역을 조금 걸으면 연못과 홍살문, 정자각이 차례로 다가선다. 언덕에 올라서면 석상, 석마, 문인석, 무인석을 앞에 둔 합장릉이 있는데, 여기가 바로 조선 왕조 500년사의 가장 뛰어난 임금인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다. 당초에는 광주 대모산에 있던 것을 예종(1469년)때 이곳으로 천장되었다. 이능을 천장후 조선조가 100년 연장되었다는 가백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영릉(寧陵)은 17대 효종(재위 1649∼1659)과 부인 인선왕후(1618∼1674)의 무덤이다.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고,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등 백성들의 어려움을 헤아렸다.
처음엔 건원릉의 서쪽에 있었으나 석물에 틈이 생겨 현종 14년(1673)에 여주 영릉 동쪽으로 옮겼다. 영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좌우로 나란히 하지 않고 아래·위로 만든 동원상하릉으로 쌍릉 형식을 취하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한 이런 쌍릉 형식은 조선왕릉 중 최초의 형태이고, 경종의 무덤인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조선왕조 왕의 무덤배치에 하나의 전환기가 된 형태로 무덤에는 병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12칸의 난간석을 설치하고, 돌 난간의 기둥 사이를 받치는 돌에 문자를 새겼다. 즉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석을 세우지 않는 전통이 선릉 때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석을 설치하면서 다시 시작되었지만, 영릉에서 다시 사라졌다. 무덤 앞에는 상석·문인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으며, 무덤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다.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을 포함한 조선왕릉(왕릉 40기, 원 13기 등 총 53기)은 2009년 6월 26일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영릉·녕릉→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 명칭변경(2011.07.28. 문화재청 고시)
(자료출처 : 문화재청 / 여주문화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2』
『문화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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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pdf (206.6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