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碑)는 보물 제229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이다.
신륵사에 모셔진 고려 말(1379년) 고승인 나옹선사의 진영당(眞影堂, 영정을 모신 집)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과 탑비 등의 건립과정 및 나옹선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록한 비석이다. 뒷부분에는 보제존자진당시(普濟尊者眞堂詩)가 새겨져 있다.
나옹선사의 이름은 혜근(慧勤) 호는 강월헌(江月軒)이다. 1320년에 경북 영해에서 탄생하였다. 20세 때 이웃 친구의 죽음을 보고 문경 묘적암(妙寂庵)요연선사(了然禪師)를 찾아 출하였다. 전국을 떠돌며 수행한 뒤 24세에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주야로 수행하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충목왕(忠穆王) 3년 원(元)으로 가서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 이르러 지공(指空)스님을 만났다. 지공(指空)은 인도 마갈타(Magadha)국 출신 승려로 당시 원에 와 있었다. 고려 충숙왕(忠肅王)대에 고려를 방문하였던 적이 있었다. 나옹선사는 지공(指空)스님에게서 법을 얻고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평산(平山) 처림(處林)스님을 만나 배움을 얻었다. 그 뒤에도 명주(明州)의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 관음(觀音)보살을 비롯하여 그 외 여러 절을 참배하고 난 후, 다시 법원사(法源寺)로 가서 지공(指空)스님을 만나고, 공민왕(恭愍王) 7년(1358)에 귀국하였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왕사(王師)가 되어 보제존자(普濟尊者)의 칭호를 받았다. 공민왕(恭愍王) 14년(1365) 4월 왕명으로 송광사(松廣寺) 주지로 가서 불교계의 개혁에 나서게 되었다. 공민왕 20년(1371) 신돈이 실각한 후 양주 회암사로 가 다시 왕사로 책봉되었다.
나옹선사는 1374년부터 2년에 걸친 양주 회암사 1차 중창불사를 진행하였다. 1375년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다. 회암사 중창불사는 이듬해인 1376년에 마무리가 되었다. 4월 15일 낙성식을 겸하여 문수법회를 열었다. 이 때 개경과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에 위협을 느낀 권문세족들이 우왕을 움직여 나옹(懶翁)선사를 밀양(密陽) 형원사(螢源寺)로 가도록 하였다. 실질적인 유배였다. 나옹선사는 도중에 병이 들어서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이르러 입적하였다. 우왕 2년(1376)에 나이는 57세였다. 나옹의 사상은 조선 개창의 정신적 지주였던 무학대사에게 이어졌다.
나옹선사가 입적하자 현재 신륵사 구룡루 앞 바위에서 화장하였다. 현재 그 자리에는 작은 석탑이 하나 있다. 그 후 신륵사 뒤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탑비를 세워두었다. 비문에 의하면 비석이 세워진 것은 우왕 5년(1379)이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한수가 썼다.
이 비석은 신라시대 이후 전형적인 석비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귀부는 대석(臺石), 이수는 개석(蓋石)으로 바뀌었다. 지대석(地臺石) 위에 4조각으로 구성된 직사각형의 별석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복련(覆蓮)·간석(竿石)·앙련(仰連)으로 구성된 비좌를 올려놓았다. 비좌 상면은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가운데에 직사각형으로 홈을 파서 비신과 지주를 꽂았다.
비신은 대리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비신 양 옆은 화강암 지주를 세우고 안쪽 면 중앙에 세로로 홈을 파서 비신을 끼워 넣었다. 대리석은 화강암에 비하여 무르기 때문에 조각하기 쉽지만 정도는 약하다. 화강암을 다듬어 양 측면에 지주를 세움으로써 비신을 보강한 것이다. 이 같은 양식은 고려 중기 이후 비신으로 대리석을 사용하는 것이 유행하면서 채용된 양식이다. 비문은 풍화로 마멸되어 육안으로 읽기 어렵다.
전면에는 나옹선사의 일생·사상·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고, 후면에는 진당시(眞堂詩)와 200여 명의 문도와 추모자의 이름이 해서로 쓰여있다. 특이한 것은 전면 끝부분에 비문을 지은이·글쓴이·새긴이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 이다. 일반적으로 지은이와 글쓴이는 비문 맨 앞쪽에, 건립에 관련된 인물은 후면 음기에 새겨진다. 비신 위에는 지붕형의 개석을 덮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모방하였는데,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기왓골, 공포, 막새기와 등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라 말 이후 귀부·비신·이수로 구성되어 왔던 석비는 고려 후기에 이르러 대석과 지붕돌로 바뀌어 갔다. 마치 목조건축을 형상화 한 것 같은데, 조사당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이 비석은 고려 말 변형기 탑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 현황』
『(국보·보물)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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