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앞 石燈)은 보물 제231호로 소재지는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이다.
회암사 주지를 지냈더 나옹선사는 왕명에 따라 밀성 영원사(密城 瑩原寺)로 가는 도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신 선승으로, 공덕산 묘적암(功德山 妙寂庵)에 주석하신 요연선사(了然禪師)에게 출가하신 후 1347~1358년에 걸쳐 원나라 지공(指空)의 문하에 들어가 수행 후 귀국하여 회암사 대역사를 마쳤다. 선사의 성은 하씨이며 속명은 원혜(元惠) 법명은 혜근(慧勤) 호는 나옹(懶翁) 시호는 선각(禪覺)이시고 나옹, 선각왕사, 보제존자 등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그의 묘탑이 자리를 잡은 곳은 신륵사 서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선승의 입적은 1376년으로 그의 묘탑과 석등은 3년 후에 각신(覺信), 각주(覺珠) 등에 의해 조성된 석종형 부도와 그 앞에 석등을 세웠다.
이 석등의 기본형은 부도형 팔각석등으로서 팔각기단 위에 팔각의 화사석과 옥개를 얹고 그 정상에 보주를 놓은 구조이다. 즉 팔각의 높은 지대석 위에 한 장 돌에 연화하대를 비롯하여 중대와 연화상대를 조각하였다. 하대부는 높은 족대와 연화하대로 구성되어 있다. 족대로 보이는 각 면에 첨두형 안상을 조각하였다. 족대 위에 일단의 낮은 각형받침과 복엽십육판 복련화대를 두른 위에 일단의 중대받침을 조출하였다. 복련화대의 연판은 매우 두터우며 그 조각 수법은 관촉사 연판조각수법과 유사한 표현수법을 따르고 있다.
중대인 간석은 팔각에 각 우주는 연주형 기둥 모양으로 조각하였으며 각면에는 아(亞)자형의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사엽화판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복엽십육판의 앙련을 조각하고 판단부에는 이단의 괴임대를 각출하여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한 장 돌에 조성된 화사석은 팔각에 각 우주는 번룡을 양각한 원주에 화사벽 팔면에는 화창을 개설하였다. 각 면에 개설된 화창에는 사라센 계통의 첨정 아치형인 화두형을 이루고 있다. 화두창 위 벽면에는 고부조의 비천상을 조식하였다. 그리고 화사석 하단부에는 높직한 괴임대가 각출되었고 상단부에도 낮은 일단의 문틀 턱을 조출하였다. 화사석의 상단에는 우주머리와 연결시키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조출하였다.
옥개석은 중후하나 처마와 전각의 반전이 경쾌하면서도 둔후감을 들어내 보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옥개 밑면에는 화사석의 평방과 잘 어울리도록 도리 대신에 일단의 각형 옥개방침을 조출하였다. 처마 면에는 서까래와 부연의 경계를 표현하듯이 단(段)을 이루어 낙수 홈의 역할을 이루도록 음각하였으나, 실제로 서까래와 부연 모습을 조각으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추녀와 사래가 설치되는 위치에는 그 모습을 조출하였다. 낙수면의 경사는 급하지 않고 팔각의 합각머리는 뚜렷하며 옥개 정상에는 반원형 연속문을 모각하였다. 그 위에 둥근 노반과 보주를 조각하였는데 연봉형의 보주는 일석으로 된 통형으로서 별다른 조식이 없다.
이상과 같이 옥개의 조형양식은 대체로 여말선초의 석조부도나 석등의 옥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라 하겠다. 이 석등은 일반적인 석등과는 달리 화사석의 재질은 연질의 대리석계통석재를 이용하였으며 그 외 부재들은 모두 화강석재를 활용하였다. 연질의 화사석은 다소의 마손이 보인다. 현재 석등이 배치되는 위치에서도 곧 알 수 있듯이 보제존자석종 및 그 묘비와 함께 세워진 연대가 확실한 석등으로서 고려 말엽의 귀중한 일예가 되겠으며, 고려 말 불교계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나옹화상의 석종형 부도의 출현과 더불어 그 앞에 석등을 설치하는 배치법은 아마도 조선시대 왕릉에 장명등을 설치하는 전통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낳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라 하겠다.
(자료출처 : 『문화재대관(보물편·석조2, 개정판)』)
『경기문화재대관-국가지정편』
『문화재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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