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생가(明成皇后生家)는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6호로 소재지는 경기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 250-2)이다.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당시 건물로 남아있는 것은 안채뿐이었는데 1975년과 1976년에 안채가 중수되었고, 1996년에는 안채가 수리되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다. 비록 집에 쓰인 목재가 그리 크지 않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도 넓지 않으나 각 구조물의 형태와 쓰임 등에서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넓은 바깥마당에 면하여 솟을대문을 가진 ㅡ자형 행랑채가 서고 그 뒤에 중문과 사랑이 붙은 ㄱ자형 문간채와 ㄱ자형 안채가 안마당을 둘러싸서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그 옆으로 ㅡ자형 별당채가 독립된 영역을 형성하고 있다. 안채는 14칸 규모의 민도리집인데 8칸 규모의 팔작지붕 본채 한 쪽에 6칸 규모의 맞배지붕 날개채가 붙어 ㄱ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안채에는 1998년에 황후 탄신 147주년을 기념하는 숭모제 때 봉안 된 명성황후의 모습이 그려진 진영이 있다. 본채는 전면에 퇴칸이 있는 오량(五樑) 구조인데 2칸 안방과 4칸 대청, 1칸 반 건넌방, 2칸 부엌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고 날개채는 삼량 구조로 안방 앞쪽에서 꺾이어 1칸 반 온돌방과 3칸 부엌, 1칸 반 광이 위치하고 있다.
생가를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열심히 글을 읽었다는 공부방이 있던 자리에 그녀의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탄강구리비가 자리 잡고 있다. 한편 생가 단지 초입에는 감고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95년부터 시작된 명성황후 성역화 사업의 대미를 장식한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 역사에서 인현왕후와 명성황후 두 분의 왕비가 거처했던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높은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감고당은 장희빈이 왕자 균(뒤의 경종)을 낳으면서 세자 책봉을 둘러싼 문제에 휘말려 폐서인된 인현왕후가 6여 년 간 머물던 사제(私第)이다. 또한 명성황후가 여주 생가에서 서울로 올라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멸실 위기에 처했던 이 건물을 여주군에서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하 여 2008년도에 복원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그 외 생가 맞은편에는 명성황후를 추모하고 관련 유물, 자료들을 전시하는 명성황후기념관이 있다. 연면적 520㎡의 전시실에는 명성황후 친필, 고종 편액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2000년 건립 이후 명성황후를 추모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기념관 옆에 위치한 문예관은 2002년도 건립되었는데 연면적 772㎡, 관람석 161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명성황후와 관련된 공연·행사 등을 위한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 경기문화포털 / 『경기문화재총람-도지정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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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내용 출처 : 경기문화포털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명성황후는 1851년(철종 2) 9월 25일 여주군 근동면 섬락리(지금의 여주읍 능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왕조의 명문가인 여흥 민씨 가문 출신인 민치록(閔致祿)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다.
여흥 민씨는 명성황후 이전 조선왕조에서만 2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그들이다. 원경왕후는 우리나라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어머니이며, 인현왕후는 명성황후의 직계 6대조인 민유중(閔維重)의 딸이자 민진후, 민진원의 누이동생이다.
명성황후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던 것으로 『실록』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배우는 것마다 잘 습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심오한 뜻의 어려운 것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기억력이 비상하여 조목조목 통달하였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명성황후는 8세에 부친을 여읜 후 여주 생가에서 서울 안국동 감고당(感古堂)으로 이사하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 살 아래인 고종과 혼인하는 1866년까지 생활하였다.
명성황후는 개항으로부터 임오군란, 서구열강과의 조약체결, 갑신정변, 조로밀약사건(朝露密約事件), 동학농민봉기와 갑오개혁 등 한국 근대사의 굵직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주요 인물로 언급되었다. 또한 고종과 함께 국정을 고민하면서 외국 사신들이나 신하들을 인견하였으며, 각종 인사나 정책 결정에도 관여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임오군란 등 각종 사건에서 그녀가 공격의 표적이 되거나, 그녀에 대한 평가가 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남성 위주의 유교적 가부장 사회의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외부에서 본 명성황후는 개성이 강하고 냉철한 인물이었다. 새로운 문물과 외부 사정에 관심이 많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심도 상당히 깊었다. 적극 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서양의 외교관들과 선교사 등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은 조정 대신들을 앞섰을 것이다. 열국의 외교관들을 통해 일본공사를 견제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험과 판단에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는 왕비로 책봉된 후 주변 열강들의 침략, 특히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으로 대항하는 정치적 탁월성을 보여주었다. 일본으로서는 이러한 명성황후가 소위 대륙 진출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와 같았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국모시해’라는 당시 전 세계가 경악한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급진적인 단발령은 이후 항일의병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경기문화재대관-도지정편』
『문화재안내문안집. 2』
『(경기도 역사와 문화) 백문백답』